[3월의 칼럼] 내 마음의 영도다리 |김동식|

평소에 학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P형으로부터 메일이 온 것은 작년 연말의 일이었다. 연말연시의 안부 메일인가 보다 했는데, 역사학자들과 『개벽』세미나 모임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개벽』은 1920년부터 1926년까지 72호를 발간한 천도교 기관지로서, 초창기 한국근대문학을 위해 많은 지면을 제공했던 요람과도 같은 잡지이다. 목차만 슬쩍 훑어보더라도 김기진, 박영희, 현진건, 나도향, 박종화, 조명희, 이상화, 염상섭. 최서해 등등 반가운 이름들을 만나게 된다. 안 그래도 전공 공부에 소홀했다고 반성을 하던 때였고, 우연하게도 그 얼마 전에 거금을 주고 『개벽』 영인본을 들여놓은 터여서, 일단은 모임에 얼굴을 내밀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한국 근대문학 전공자들에게 자료 읽기는 숙명과도 같은 작업이다. 그래서 개화기부터 해방기까지 발간된 신문과 잡지들이 영인(影印)되면 대부분의 경우 구입을 하게 된다. 다 보지도 못할 신문 잡지 영인본을 습관처럼 구입한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10년 넘게 거래를 하고 있는 영인본 판매 아저씨의 수금 대장에는 늘 비슷한 금액이 깔려있다. 어느 정도 갚으면 새로운 영인본이 나오고 욕심이 생겨 가져다 놓으면 또 그만큼 빚을 지게 된다. 그 동안 구입한 영인본 가운데 가장 아끼는 책은 『독립신문』이다. 가끔 마음이 울적하면 『독립신문』의 아무 곳이나 펼치고 슬렁슬렁 읽는다. 엽기적으로 들리겠지만, 엄청나게 재미있다. 공부가 『혈의누』와 『무정』을 왕복하는 수준이라서, 192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수놓은 『개벽』과는 그다지 친밀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지평을 조금 더 넓혀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젊은 연구자들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경험이다. 지난 화요일에 만나서 세미나 방식과 일정에 대한 대강의 논의를 끝내고,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잔을 따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오갔는데, 어쩌다 보니 화제가 유년기의 기억으로 흘러들었다. 그 중에서 세미나 팀장이자 사학과 교수인 I 선생이 들려준 유년시절의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선생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처럼 다양한 퍼스펙티브가 교차하는 역사서술을 해보고 싶다며, 아마도 자신이 역사를 전공하게 된 것은 어렸을 때 고향 여수에서 들었던 그 어떤 말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말이었을까.
“참꽃을 먹으면 살고 개꽃을 먹으면 죽는다.”
이용복의 노래처럼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을 가진 양반이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참꽃은 진달래이고 개꽃은 철쭉이라고 한다. 뒷산에 놀러가서 진달래 꽃잎은 따먹어도 되지만 철쭉 꽃잎을 따먹으면 무척이나 곤욕을 치른다는 뜻이었다. 진달래가 먼저 피고 철쭉이 나중에 피기는 하지만, 두 꽃이 함께 피어있는 시기에는 꽃잎의 비슷한 색깔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는 것이었다. 산으로 놀러 나온 어린아이들의 들뜬 기분을 고려하면 개연성이 있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은 참꽃과 개꽃에서 참과 거짓의 의미를 끌어내었는데, 자신이 역사를 하게 된 것이 ‘참(진리)을 먹으면 살고 거짓을 먹으면 죽는다’는 무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개나리가 참나리와 상대되는 꽃을 지칭하는 말이고, 접두사 ‘개-’가 ‘참 것이 아닌’ 또는 ‘함부로 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타당한 해석이었다.
오해가 있을까 봐서 부연하자면, 선생의 태도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이성중심주의나 진리에 대한 집착 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참’이란 자료를 읽어가는 실증적인 작업과 자료를 해석하는 역사 기술, 모두에 적용되는 윤리적인 태도 또는 학문적 진정성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많은 자료를 꼼꼼하게 읽고 다양한 퍼스펙티브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의 폭과 깊이를 동시에 드러내겠다는 그의 태도를 생각하면 별다른 오해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유년 시절에 주워들은 이야기가 그를 역사로 이끌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도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참꽃과 개꽃은 그의 학문적 태도를 대변하는 일종의 알레고리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참과 거짓에 대한 명료한 무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가 잠시 부러웠을 따름이다.
술자리의 상호주의라고나 할까. ‘김 선생도 비슷한 기억이 없느냐’고 해서, 어린 시절에 부산에서 살았는데 집 위쪽으로 월남 난민 수용소가 있었고 가끔 외출을 나온 아이들과 눈으로 인사를 했던 기억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 아이들의 맑고 깊은 눈동자에 어린 그 어떤 우수(憂愁) 때문인지, 뉴욕 다음으로 가고 싶은 곳은 베트남이라는 말을 덧붙였던 기억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을 소개했다.
“네 진짜 엄마가 누군지 아니?”(사투리로 번역하면, “느그 진짜 엄마가 누군지 아나?”)
어렸을 때 누구나 그런 질문을 받게 되지 않는가. ‘진짜 엄마가 누군지 아니? 그 동안 숨기고 있었는데, 지금 엄마는 너의 진짜 엄마가 아니란다.’ 존재론적인 위기가 대번에 몰려오는 질문이다. 황급한 마음에 주변 어른들과 부모님께 구원을 청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때마다 다리에서 주워왔다고, 정확하게는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네 엄마는 영도다리 밑에서 살고 있는 여자 거지’라는 말로 어린 가슴에 대못을 박곤 했다. 그런 거짓말은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항변을 해보지만, 어른들은 한 술 더 떠서 여기 오는 길에도 그 여자거지를 보았으며 가끔 나를 보려고 집에 동냥을 하러 온다며 이야기를 부풀려나갔다.
일반적으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은 다리(橋梁)와 다리(脚)의 동음이의적인 성격을 활용해서 출산의 비밀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럴 듯한 비유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부산의 영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도다리 주변의 풍경에 익숙했다. 실제로 영도다리 밑에는 거지 움막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자거지들도 살고 있었으며, 가끔은 아기를 업은 여자거지가 거리에 나타나 이목을 끌기도 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이 모든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상징도 아니고 상상도 아닌, 무서운 실재로서 영도다리와 여자거지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라캉의 실재(real) 개념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영도다리 밑의 여자거지이다.) 어머니께서도 말 안 들어 꾸중하실 때면 진짜 엄마 찾아가라며 영도다리 쪽으로 등을 떠미셨으니 말이다. 누가 진짜 우리 엄마란 말인가. 왜 나를 다리 밑에서 데리고 온 것일까. 진짜 엄마는 잘 있을까, 오늘은 얼마나 벌었을까. 밥이나 제대로 먹었을까. 이 길로 진짜 엄마를 찾아서 영도다리로 가야 하나……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그 당시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는, 어린 나의 비극적인 상황을 거울처럼 비추어 주고 있었다. 이를 두고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유년기의 몽환적인 트라우마(Trauma)가 아니라고 한다면 도대체 뭐라 할 것인가.
유쾌한 술자리는 막을 내렸지만, 쓸데없는 생각은 집으로 가는 길을 따라서 이어진다. 내가 문학을 하게 된 비(非)인과적인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문학에 낭만적인 관심을 갖게 된 인연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 마음의 영도다리와 여자거지가 아닐까. 영도라는 말은 다분히 촌스러운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영도라는 말은 그림자 섬[影島]이라는 낭만성과 영도(零度, degree zero)의 글쓰기를 연상하게 한다.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의 영도」를 흉내내어 「글쓰기의 그림자 섬」이라는 글을 써보면 어떨까하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해 본적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영도는 기호이자 이미지이다. 영도는 고향의 기호나 이미지라기보다는, 기호와 이미지의 고향에 가깝다. 그리고 영도다리는 이미지와 실재 사이에 놓여진 상징적이면서도 상상적인 다리일지도 모르겠다.
부산에 가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영도는 영도다리에 의해서 육지와 연결된 ‘섬 아닌 섬’이다. 영도다리는 1931년에 착공되어 1934년 3월에 준공되었는데, 선박이 통과할 때에는 다리의 양쪽으로 들어올려서 배를 통과시키는 개폐교(開閉橋)였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봉합이 되었기 때문에 다리를 들어올리는 장면을 보지는 못했다. 또한 다리 위에는 전차 궤도가 부설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미 철거되어 그 흔적만을 보았던 기억이다. 지금은 부산대교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의 고향은 그림자 섬이라는 이름처럼 실재와 환영 사이에서 춤을 추는 영도이며, 뭍도 아니고 섬도 아닌 애매함을 흩뿌려 놓는 영도다리이다. 나에게 영도와 영도다리는 문학과 관련된 원초적 풍경에 해당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지금은 월남 난민 수용소도 없고, 영도다리 밑의 거지도 없다. 커다란 눈망울의 월남 소녀는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영도다리 밑의 그 많던 거지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때의 그 엄마’는 지금도 잘 계실까.

* 평론가 김동식은 비평집 <<냉소와 매혹>>을 펴냈으며, 계간 <<문학과 사회>>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2004.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