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검으나 희나 봄봄 |박민규|

얼룩말을 처음 본 것은 1975년版 <<계몽 컬러 어린이대백과사전>>을 통해서였다. 그때의 복잡한 기분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레드 제플린과 딥 퍼플과 핑크 플로이드가 수록된 <<월간 팝송>>의 화보를 넘기다가, 한 귀퉁이에 있는 탐 존스와 대면한 기분이었다.
도대체가 흑과 백이라니… 이봐 대체 어쩔 작정이야? 무렵에도 ‘보호색’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이지 나는 얼룩말의 멱살이라도 흔들고 싶은 기분이었다. 록 스타에겐 록 스타의 보호색이, 동물에겐 동물의 보호색이란 것이 있다고, 당시의 나는 철썩 같이 믿고있었다.
하지만 줄줄이, 나는 얼룩말과 궤를 같이 하는 동물들을 알게 되었다. 즉 말레이맥과, 팬더와, 젖소와 범고래들이 ― 탐 존스 뒤의 크리스토퍼 크로스처럼, 연거푸 등장한 것이었다. 화가 났다. 도대체 ‘룰’이란 게 있는 세계인가? 살을 찌우고, 소매를 말아 걷고, 셔츠의 단추를 세 개 풀고, 가슴의 털을 강조하고, 그 위에 당장 금목걸이를 두른 채, 굵은 허리를 흔들며 지구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딜라일라, 될 대로 되라지. 나는 민감한 소년이었다. 보호색이, 뚜렷한.
얼룩말이라든지, 그 흑백의 동물들을 다시 떠올린 것은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우연히 산책을 나섰는데,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 <보이저 2호>의 잔해가 떨어졌다. 유성이라 착각하기 딱이었지만, 검으나 흰 얼룩의 잔해 위에는 분명 <NASA>와 <Voy…>까지의 영문이 적혀있었다. 다른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는 잔해의 곁에 걸터앉아 봄볕을 쬐기 시작했다.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아지랑이에 용해되고 나자, 잔해는 유순한 동물처럼 고분고분 식어 있었다.
안녕. 일단 말을 건넨 후, 나는 잔해의 속을 뒤져보았다. 그곳엔 은빛의 작은 박스가 하나 있었고, 그 속에 은하계와 남녀의 누드가 그려진 한 장의 그림과, 수많은 문장이 쓰여진 특이한 재질의 금속판이 들어 있었다. 나는 묵묵히, 그것을 읽어 나갔다. 그것은 수많은 문장이라기보다는 ― 즉, 하나의 문단을 지구의 모든 언어로 표기해 놓은 것이었다. 나는 결국, 끝에서 두 번째에 나열된 한국어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지구의 봄을 발명한 동물들의 명단입니다. 얼룩말, 말레이맥, 팬더, 젖소, 범고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렇겠군,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제서야 봄에 대해 아주 약간의 상식을 얻게 되었단 생각이다. 겨우 개나리를 안다고 해서 봄을 아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이 세계는 ‘보호색’을 가지지 못한 개체들도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해. 꾸벅꾸벅 머리를 끄덕이며, 어느 날 얼룩말과 말레이맥과 팬더와 젖소, 그리고 범고래는 ‘봄’이란 것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그곳이 서귀포의 해안이건, 남아프리카의 오렌지 강 하류이건, 혹은 말레이반도의 이름 모를 리아스식 해안이거나, 괌이나, 오키나와의 한 어귀인지는 알 수 없지만 ― 아무튼 이 세계의 어딘 가에서, 그들이 ‘봄’을 발명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봄이다. 검으나 희나, 혹은 아직 숨지 못한 당신을 위해 봄의 잔해가 추락해 왔다. 오늘만큼은 안심하고 산책을 하자. 봄은 한 마리의 얼룩말이나 탐 존스처럼, 초원의 끝에서도 보일 만큼 선명하고, 뻔뻔하고, 힘찬 것이다. 나는 전화를 걸어, 오래된 방송국의 오래된 라디오 프로그램에 노래 한 곡을 신청했다. 전화를 받은 것은 범고래였고, 그는 팬더의 목소리를 흉내내 다음과 같이 물어왔다.
그러니까,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라구요?

* 소설가 박민규는 2003년 <<지구 영웅 전설>>로 문학동네 신인문학상을,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04.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