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아무 것도 아닌 것 |성기완|

무용지물(無用之物).
쓸데가 없는 물건이란 뜻. 예를 들어 개똥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개똥은 쓸데가 없을뿐더러 더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똥을 싫어한다. 어쩌면 미워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개똥 같은 것은 정말 미워해도 좋을 대상이다. 누가 개똥을 미워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개똥을 미워한다. 지난 번에는 언덕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다가 힘이 부쳐서 자전거를 내려 걸어가다가 그만 개똥을 밟고 말았다. 뭉클한 개똥을 밟자마자, 아차, 밟았구나, 싶었다. 발을 쳐다보니 어쩌면 그렇게도 누렇고도 싱싱한 개똥이 발바닥에 붙어 있는지. 마치 개처럼, 가로수 주변에 있는 아주 조금의 흙에다가 발을 막 문지른 다음 가로수 뿌리를 네모낳게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얕은 턱 모서리에 발바닥을 싹싹 문질러 개똥을 닦았다. 개똥의 켜는 그 모서리로 옮겨갔고 내 신발에서는 개똥이 거의 지워졌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좋은 봄날이었는데, 재수가 없었다. 아마도 개도 봄날이라 길거리로 나와 주인과 산책을 하다가 가로수 옆의 그 아주 조금의 흙에다가 기분 좋게 한딱까리 한 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도시에는 참 흙이 없다. 개들도 산책길에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거 흙 참 없군. 내 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지만 내 똥 눌 한 줌의 흙도 내가 똥누려니 없어. 아, 저기 있네. 가로수. 그 주변. 도심에서 가로수만이 흙과 직접 몸을 대고 있어. 뿌리를 따라 내려가면 도시의 검은 아스팔트 표면 밑에 잠들어 있을 붉은 흙더미 속의 와일드한 자연이 있어. 숨쉬고, 분비물들이 뒤범벅되어 있고, 그 속에 벌레들이 길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뿌리들은 흙을 따라 내려가는 수분을 억세게 붙들어 흙을 질척하게 유지할 거야. 이거 흥미로운 걸. 한 번 파보자.”
과연 똥개는 흙을 잘 판다. 앞발을 사용하여 잽싸게 흙더미를 헤친다. 똥을 눈 뒤 오줌도 지렸을 것이다. 나무에 오줌 자국이 묻어 있다. 그래서 그 거리는 그 똥개의 이정표들을 가득 담고 있는 거리가 된다. 그들 나름의 신호체계 속에서 똥개들은 사람이 똥을 밟고 아니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똥을 눈다. 조심해야할 것은 사람이다. 개의 책임은 아니다. 개이 특징이자 가장 큰 즐거움은 책임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은 책임이 있다. 헌법에 그렇게 적혀져 있다. 왜 그런지 개나 고양이는 흙에다가 응가를 하길 즐긴다. 작년, 3호선버터플라이의 3집을 녹음하기 위해 김포의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 그 집 고양이 ‘미짱’도 응가 전용으로 쓰는 모래틀이 있었다. 미짱은 깔끔하다. 미짱은 그 모래틀에 응가하길 즐긴다. 그런데 어느날 보니 그 모래 응가틀에 똥이 하도 꽉꽉 차서 넘쳤다. 미짱은 며칠 동안 그 응가틀을 버리고 아무데나 똥을 누려 했다. 계단에 고양이 똥이 출현했고 사람들은 조금 놀랬다. 그제서야 응가틀의 모래를 갈아주었다. 미짱은 다시 모래 위에 똥을 눈다. 계단에 똥이 출현한 것이 고양이의 책임은 아니다. 고양이의 특징이자 가장 큰 즐거움 역시 책임이 없다는 점이다. 사람은 책임이 있다. 헌법 어딘가에 그렇게 적혀져 있다.
그래서 사람은 개똥과 조금 다른가 보다. 사람은 무릇 무언가에 쓸만한 것이다. 태어나면서 호적에 등록을 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받는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헌법에 적혀 있는 ‘국민의 4대 의무’니 하는 것을 싫든 좋든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에 아마 노동의 의무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노동이 의무다. 노동을 해야만 한다. 노동이란 쓸만한 뭔가를 하는 것이고 쓸만한 뭔가를 하는 것에 의해 먹고살 것들을 장만하는 일이다. 사람은 소를 부려먹기도 하고 말을 부려먹기도 한다. 소나 말은 꼭 밭을 갈거나 열나게 뛰어야할 책임은 없다. 그런데도 소나 말은 사람이 시켜서 그렇게 한다. 소나 말의 표정은 너무 사려 깊고 아름다우며 이해심이 넓은 것 같아서 마치 그 일들이 자신들이 하늘에서 점지될 때부터 숙명적으로 타고난 일인 듯 하지만 사실 그 일들은 사람 때문에 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들은 풀을 뜯어 먹다가 무시무시한 사자 같은 것들이 다가 오면 적당히 무리지어 피해 다니기만 하면 될 생들이었다.
물론 사자나 소나 개나 고양이도 일을 하긴 한다. 먹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일이라고 한다면 그들도 열심히 움직인다. 그들도 열심히 사냥해서 먹고 열심히 풀뜯을 곳을 골라 다닌다. 그것은 아마도 가사노동 비슷한 것일 것 같다. 가사노동은 그래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너무나 필요한 것이어서 때로 불필요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심지어 나는 실제로 ‘씹기가 귀찮아서’ 먹던 것을 뱉는 사람도 봤다. 정말 너무 씹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그 사람은 여자다. 그녀는 죽을 좋아하고 대신 시를 싫어한다.
詩.
시 같은 건 너무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개똥일까. 왜그런지 시 같은 건 무시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에게도 없지는 않다.
어느 시대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한 합의가 있다. 지금 시대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마도 시 같은 걸지도 모른다. 시는 돈도 되지 않고 뜻도 통하지 않고 아무 것도 아니다. 대신 반대의 생각도 통한다. 돈도 되고 뜻도 통하고 사람들이 감동 받는 시는 시가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무용지물. 종교적 개념에도 ‘무상성’이라는 것이 있다. 프랑스 어로는 gratuité의 번역어인 이 무상성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예수가 신인데 뭐하러 이 개똥같은 인간들을 위해 희생하느냐는 의문과 관련이 있다. 답은 딱 하나다. 아무 바라는 것 없이 했다는 것. 물론 이 대목에서 오해하면 안 된다. 내 말은 시가 그렇게 예수의 무상한 행동과 비슷한 고귀한 차원의 무언가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는 사람을 구원하지만 시는 구원하기를 바라지조차 않는다. 게다가 예수님은 주일마다 신도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십일조의 수혜자이기도 하지만 시는 돈도 되지 않는다. 어느 교회의 목사 아들은 분명히 맨 처음 헌금이었을 돈을 가지고 저질 스포츠 신문을 운영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것들을 운영할 수 없다. 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면 시가 아니다. 맞다. 이해하시라. 이렇게 뒤집는 것은 무슨 억하심정 때문이다.
이 글은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글이다.
스톱.

* 성기완 시인은 시집 <<쇼핑 갔다 오십니까>> <<유리 이야기>>를 펴냈고, 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리더로 활동중이다.

(200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