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지하철의 바흐 혹은 2004년의 1928년 |김예림|

해외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바다 건너 여행을 많이 해보지도 못한 터라 어느 나라 문화는 어떻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나로서는 좀 멋쩍은 일이긴 하다. 10여 년 전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었고 그 다음에는 신혼여행 티낸다고 발리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2년 동안 어찌어찌 기회가 닿아서 동경에 두 번 갔다 온 게 내 여행 경험의 전부니까 말이다. 여행자의 시선은 종종 이그조티시즘으로 젖어 있고 잠깐의 스침에 그치기 마련이므로 이국의 많은 것을 오래 동안 깊이 체험한 사람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다. 그래도 시끌벅적한 서울이나 일산에서 살다가 보면 여행의 추억에 빠지는 때가 있다. 아니, 추억에 빠진다는 표현이 정확하지는 않다. 이미 오래 전의 혹은 수개월 전의 ‘아름다운’ 기억을 지금 새삼스레 곱씹고 있는 낭만은 아무래도 좀 엉뚱하다. 그래도 여행지의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건 왜일까.
솔직히, 발리는 잘 모르겠다. 그야말로 관광객의 룰을 충실히 수행하다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나를 사로잡고 있는 기억은 이름을 알 수 없는 파리의 어느 어두침침한 지하철역에서 울려 퍼지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이다. 전체적으로 푸르뎅뎅한 빛깔을 띠고 구부러지는 지하보도를 따라 이동하고 있을 때, 그 음악이 땅 밑 세계 전체를 조용히 흔들면서 차오른 것이었다. 나는 그때 이후 지하 공간에서의 공명이 웬만한 스피커보다 좋지 않을까 하는 별 근거 없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바흐적인 무게의 우울이 음악당보다 침울하게 커브 도는 파리 지하철역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역시 별 근거 없는 확신 또한 가지게 되었다.
내가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의 몇몇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아래로 깊이 침잠해 있는 문화였다. 모든 것이 들떠 있지 않았고 그래서 무엇보다도 고요했다. 문명의 번잡스러움은 아주 긴 시간의 흐름에 서서히 마모되어 온 듯, 번쩍거리며 부산을 떠는 대신 조용히 아래로 가라안고 안으로 깊숙이 번져 들어가 있었다. 지하철역의 음악소리는 적어도 나에게는 이러한 내면화의 감각적 표상이었다. 그것은 현란하지 않음, 과잉되지 않음, 가볍지 않음 그리고 스며들어-배어나옴을 의미했다.
동일한 생각을 길지 않았던 동경 여행에서도 갖게 되었다. 내 책꽂이 방에 있는 책들 가운데 복사본이나 영인본 말고 원본으로 제일 오래된 것은 ‘소화 3년’ 그러니까 1928년 동경에서 출간된 『神經衰弱癡呆症と梅毒』이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주제이기도 했지만 가지런히 정리된 작은 서점 한 구석 누렇게 바랜 상자에 들어있던 옛날 책이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었기에, 나는 2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76여 년 전의 기록을 얼른 가졌다. 책도 책이지만 동경의 헌책방 거리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문화의 축적과 보존이란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와세다대학 앞이나 간다에 늘어서 있는 헌책방 어슬렁거리기를 동경여행의 필수로 생각한다. 공부와 관련된 정보도 얻고 최근 책도 싸게 살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점이 물론 있지만, 국경을 넘어서까지 공부에 연연하는 미련이나 유난을 떨고자 그곳에 가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소리 없이 켜켜이 싸여있는 문화의 층, 그 층을 소리 없이 음미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간의 소유가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런 풍토가 있는 것이다.
서점가 근처의 크고 작은 찻집도 마찬가지다. 1인용으로 적당한 자그마한 사이즈의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사람들은 책과 신문을 들고 오직 자신만의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일본인의 개인주의나 폐쇄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어 왔다. 공공장소의 공간배치와 분할이 그 사회의 문화패턴과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찻집에 들어서는 순간 절절하게 확인했지만, 이러한 배치나 분할을 가능케 하는 조건에는 분명 숙성된 문화의 힘이라는 게 있겠다 싶어 사실 나는 몹시도 부러웠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30여년을 그곳에서 산 한 후배는 한국사회의 역동성이 정말 놀랍고 좋아 보인다고 한다. 어느 사회나 양면성을 가지며, 일장이 일단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을 발산해야 하고 빨리빨리 갈아엎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얻은 적지 않은 집단적 스트레스를 다음 욕망의 충족을 위해 ‘세게’ 풀어버려야 하는 한국사회는 침잠이나 축적의 문화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난만한 봄의 북적거리는 거리를 걷다 보니 문득 열정이 정련되고 내면이 사유(私有)된, 빛나는 눈을 조용히 내려뜬 내향성의 문화가 그리워진다.

* 평론가 김예림은 계간 <<문학·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