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내 사랑, 그리운 도모코 |최성실|

얼마 전 한·중·일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비교 고찰을 주제로 각 국의 대표가 발표를 하고, 이에 대한 토론이 덧붙여지는 형식으로 마련되었다. 대중문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이 자리에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하게 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이 자리에 부르신 준비위원회 위원장님은 평론집에 실린 글 같지도 않은 글을 대견하다 여기셨는지, 나의 능력과 자격에 대해서는 도통 관심이 없으신 듯 보였다.) 게다가 한류열풍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 덧붙여졌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내가 아는 한류열풍이란 막연한 그리움과 환몽의 대상인 배용준과 일본 아줌마 부대, 장동건과 원빈의 브로마이드를 사기 위해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관광객들, 가수 보아, X-Japan의 숭배를 받는 일본 록 음악계의 전설 호테이 도모야스(한국인) 정도였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에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 대해서 갖고 있던 반감이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 사건과 고이즈미 신사참배로 최고조에 달하면서, 상대적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호감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것이 한류열풍의 시작이었다는 것, 그 이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 졌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면 유령 같은 한류열풍의 실체를 찾아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일본과 한국에서 동시에 개봉된 영화, 드라마에 대한 일본, 중국 대중들의 반응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였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일본어 전공 친구와 한 다리 건너 알게 된 중국인 친구를 동원하여 각 국에 떠 있는 인터넷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쉬리>, <겨울연가> 뿐만 아니라 한일 합작드라마, 중국에서 연일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방영된 <사랑이 뭐 길래> 같은 드라마에 대해서 이들은 왜 그렇게 열광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그러던 중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몇 백 건의 글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본 대중은 한국 대중문화의 수준, 그러니까 작품에 대해서는 그렇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 대중을 사로잡은 것은 오타쿠 문화와는 다른 복고적 취향(혹은 시대착오적인)의 한국 문화 성향이었다. 이들은 한국대중문화가 일본에서는 이미 20년 전쯤 유행했던 것들을 다시 복원시키고 있으며, 그 뒤쳐짐이 역설적으로 심리적인 위안을 준다고 했다. 일본의 중산층 여성을 휘어잡고 있는 배용준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의 연기 실력, 혹은 출현한 <겨울연가>의 작품성 때문에 환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된 남성의 이미지, 그렇게 세련되지도, 섹시하지도 않으면서, 낭만적인 사랑의 꿈을 품게 만드는 이미지가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것이다. 배용준과 사랑을 속삭이고 싶어서 한국말을 배운다는 일본여성은 이미 중년을 넘어서 있지만 핑크빛 사랑의 꿈만은 절대로 접을 수 없으며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고 싶다고 적고 있었다. 가족의 해체, 감각적인 사랑의 홍수 속에서 중세 기사도를 발휘하는 남성이란 골동품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일본문화에서 느낄 수 없는 낭만적 사랑의 위안을 한국대중문화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일면도 있다. 일본에 개봉되어 70억의 순이익을 올린<쉬리>나 개봉 예정인 <태극기 휘날리며>는 일본의 정치적 보수성, 즉 유교적인 전통과 반(反)북한의 정서에 철저하게 영합하고 있는 영화다. 정치적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적당히 위안을 주고받으면서,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것이 지금 동아시아 대중문화 교류의 한 단면인 것이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애정 행각만큼 지극히 정치적인 것도 없다. 일본학자는 개화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에 소개되고 있는 「한국인과 일본여성의 연애」에 관한 글을 썼다. 그에 의하면 한국에서 제작된 드라마나 영화뿐만 아니라 한일 합작드라마에 공통적으로 한국남성과 일본여성의 사랑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테마가 빠져있는 공중파, 지상파 방송은 없었다고 한다. 동경의 백화점에서 근무하는 아사이 도모코와 지훈의 사랑을 그린 <프렌즈>, 동경호텔에서 근무하는 오쓰키 지즈루와 홍대진의 연애를 그린 <소나기> 등을 비롯하여 <별의 소리>, <순애보>에 이르기까지. 뿐만 아니라 신성일과 윤정희가 주연을 맡은 영화 <일본인>(1968), 장동휘가 주로 출연했던 <동경의 왼손잡이>, <굳바이 동경>, 특히 3.1절 특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는 모두 한국남성과 일본여성의 연애를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대중 흥행물인 것이다.
일찍이 한국문헌에도 일본남성과는 다르게 일본여성은 긍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1764년)에는 “그 중 계집들이 다 몰수 일색이다. 샛별 같은 두 눈과 주사 같은 입술, 잇속은 백옥 같고 눈썹은 나비 같고, —사람의 혈육으로 저리 곱게 생겼는고” 하면서 주절주절 극찬을 늘어놓고 있다. 꽁꽁 여미고 다니는 다소곳한 일본 여성이 일하느라 불룩불룩 튀어나온 근육질과 아무렇게나 여민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살았던 조선 여성보다는 훨씬 더 섹시하고 뭔가 있어 보였을 것이다. 드러내지 않고 감추면서 조그만 입술을 삐죽삐죽 거리는 일본 여성에 대한 호감을 어찌 숨길 수 있으랴. 남성적 시각에서 ‘여성적인 것’의 전형들을 그대로 갖고 있는 일본 여성은 인형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6mm포르노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중에 대다수가 일본 여성이라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학자는 한국에서 제작된 포르노에서 침대에 묶여 있거나 엉금엉금 기어 다니면서 더러운 분비물을 핥고 있는 여성들의 대부분이 왜 일본여성인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일본 여성을 통해서 한국 남성들은 뭔가 역사적 원한을 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눈에 포르노는 성적 유희의 무엇이 아니라 반일 감정이 섞여 있는, 말 그대로 ‘역사적 재현’으로 비쳤던 것이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일본학자의 의중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순간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 것만은 사실이다. 순수한 유희, 성애조차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인 사랑만이 어쩌면 사회적인 ‘계약’과 ‘제약’으로 묶여 있는 관계 속에서 이해나 의무를 넘어서게 하는 유일한 것은 아닐까 하는—.
대중문화에 주로 등장하는 연애나 사랑은 사실상 가장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들로 둔갑된 경우가 많다. 만약에 일본 남성이 한국여성을 침대에 묶어 놓고 강렬하게 섹스를 하는 포르노를 찍었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서의 문제는 단순한 포르노 영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한국 여성의 학대로 시작하여 위안부 할머니, 식민지 체제 등 온갖 정치적 문제들이 줄줄이 걸려나올 것이다. 어떤 방송국의 드라마도 일본 남성과 한국 여성의 사랑을 치열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들의 사랑은 왜 금기되어야 하는가.
한일 대중문화가 화해와 화합의 분위기 속에서 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교묘하게 서로 배제하고 규제하는 논리가 가시적으로 혹은 비가시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순수한 사랑의 환타지는 역사적, 정치적 사건으로 둔갑되고 ‘트라우마’를 확인하는 ‘기억’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 현상에 문화적 혼성성, 잡종성이란 전위적 사유를 덧붙일 수 있을까. 섞여 있는 척 하면서 교묘하게 배제하고, 나누어 놓고 관념화시키는 대중문화의 고질적인 풍토 속에서 과연 어떤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아침 7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일본학자를 배웅해준다는 핑계로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밤새도록 술을 마셔댔지만 머리 속만 더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러나 나에게 처음으로 동성애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일본여자 친구는 잘 있을까. 함께 술 마시면서 목욕했던 나무통도 잘 간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참, 보고 싶다. 내 사랑 도모코!

* 평론가 최성실은 비평집 <<육체, 비평의 주사위>>를 펴냈다.

(2004.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