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상대적인 세상에서 |박성원|

1.
내가 사는 동네엔 잘 생긴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 높이와 허리둘레를 봐서는 족히 수백 년은 살았을 것이다. 그 나무는 언제보아도 정지해 있는 듯이 보인다. 정지해 있는 듯이 보인다?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정지해 있는 것이 맞다. 그런데 갈릴레이의 고전상대론에 따르면 정지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전적 상대론이든 아니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든 어쨌든 상대론에서 말하는 상대속도의 개념으로 보자면 느티나무는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5초 만에 서울에서 대전까지 갈 수 있는 초속 3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밥을 먹을 경우 밥알의 속도는 얼마일까? 기차 안에서는 거의 정지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기차 밖에서 보면 기차의 속도만큼이나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속도란 관측되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만 정의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심어진 나무 한 그루는 태양의 위치에서 보자면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속도인 초속 30km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된다. 때문에 지구 위의 모든 물체는 정지해 있으면서도 모두 움직이고 있는 것이 된다. 모두 잘 아는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갈릴레이의 고전적 상대론에 관측자를 함께 운동하는 상태로 만들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으로, 뉴턴의 물리법칙들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때문에, 무려 1천5백여 년을 절대 진리로 군림했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갈릴레이의 지동설 때문에 진리의 권좌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과학적 진실, 수학적 명제까지도 감각적 지식과 함께 그 타당성을 의심해야 한다고 말했고, 흄 역시 내일도 태양이 떠오를 것이라는 인과성의 법칙은 추론하여 얻은 신념일 뿐이라고 했다.
과학은 칼 포퍼가 말한 ‘반증의 원칙’이 가능할 때만 진리인 것이 아니라 상대성이론이 말해주듯 정지와 운동이라는 극단적인 대치점까지도 동시에 진실이 될 수 있음을 커밍아웃 했다. 불변과 절대 중심이라는 로고스 중심주의는 현재에 와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가 되었다.

2.
한 인간이 자신이 사랑하는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한다. 한 인간은 구름 한 점 없이 온통 파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개에게 말한다. “개야, 너는 참으로 안됐다. 너는 색맹이니 이토록 파란 가을 하늘을 볼 수가 없구나. 파란 하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면 너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텐데. 칸트가 말한 숭고의 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아. 나는 이 파란 하늘을 재현해 볼 거야.” 그러자 개가 힉힉 웃으며 말한다. “인간아, 인간아. 너는 뭘 볼 줄 아니? 네가 볼 수 있는 것은 전자기파의 극히 일부분인 가시광선밖에 없단다. 너는 비가시 영역을 보지 못하지? 하늘이 파란 것이 아니라 그건 빛의 산란 때문에 나타난 가짜 색깔을, 네가 파랗게 보기 때문에 파란 것이야. 존재하는 것을 모두 지각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너는 꼭 버클리 같구나. 파랗지도 않은 하늘을 보며 파랗다고 우기면서 아름답다고 오해를 하지. 그리고 그 오해를 진실이라고 믿지. 데카르트가 말한 악령의 가설처럼 말이야. 너의 생각은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헛된 인식의 결과일 뿐이야. 차라리 료타르처럼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알지만 표현할 수 없다고 몸부림을 치는 게 낫지. 아니면 비트겐슈타인처럼 차라리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을 하던가.”
인간은 개를 노려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인간의 눈에 나타난다. 인간은 손에 쥐고 있던 개 목걸이와 연결된 줄을 마치 채찍처럼 집어던지며 말한다. “개야, 너 오늘 저녁밥은 없다. 토기는 토기장이가 빚은 대로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 법이니까.” 인간은 그렇게 말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개는 한동안 망설인다. 바닥에 떨어진 줄을 본다. 그러다가 냄새를 맡으며 주인을 따라 힘없이 걷는다. 벌써부터 배가 고프다. 왜냐하면 개 역시 자연의 한 양태(mode)이며, 대자적 존재(being-for-itself)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잘 만날 걸, 하고 개는 생각하지만 마르쿠제가 말한 것처럼 주인을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해서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태양만이 두 개의 그림자를 비춘다. 그리고 두 개의 그림자는 상대적으로 길이가 다르다.

3.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관측자의 운동 상태에 의해 정해진다. 운동하는 두 사람이 느끼는 시간과 공간은 서로 다르다. 각자의 운동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흘러간다. 그런데 상대성이론뿐만 아니라 철학도 상대적이다.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과 수많은 언표들 중에 무엇이 옳은지 나는 모른다. 또 누구의 말이 맞는지, 어떤 사람의 생각이 맞는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철학이 상대적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만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체 게바라가 그려진 옷을 입고 제리 스프링거 쇼에 방청객으로 나가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둘째로 영화 『매트릭스』를 두고 침 튀겨 가며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철학의 옷을 입히고 또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포장하여 팔아먹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떡고물을 얻어먹는 도둑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며, 결국 체제에 편입하여 무용함을 유용함으로 써먹는 타성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악하다. 그래서 철학을 무용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무지와 체제가 만든 상품을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 아닌가? 내 생각이 틀렸다면 말고.

* 소설가 박성원은 작품집 <<이상, 이상, 이상>>과 <<나를 훔쳐라>>를 펴냈다.
(2004.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