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지하철- 악순환 속의 순환선 |강정|

지하철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일렬횡대로 마주 앉은 사람들과 손잡이를 잡고 서 있거나 출입문에 기대 선 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지하철을 타면 언제든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하철은 일상의 한가운데를 종횡하는 진자와도 같다. 그런데 지하철 안에 일상의 기저를 뒤흔들어 총체적인 궤멸을 예고하는 파괴의 알들이 슬어져 있다. 도시를 파멸로 몰고 가는 인간 유형들의 극단적인 경우는 종종 지하철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게으름을 피웠거나 시간착오가 있지 않는 한, 지하철은 약속시간을 꽤나 엄격하게 지켜준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코스를 반복운동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일종의 자동반응장치가 몸 안에 내장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하철은 일률적으로 통제된 시간을 각각의 사람들에게 배분한다. 누구는 10분, 누구는 34분, 누구는 1시간 10분 등등. 때문에 비슷한 시간대에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설사 단 한 정거장을 공유할 뿐이더라도, 어느덧 낯익은 지인이 된다. 심지어 꿈속에까지 찾아와 연분을 갖게 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그때는 마치 지하철 창밖에 어둡게 반사된 또 다른 내가 지하철 안으로 들어와 알은체를 하는 것과도 같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인데, 너무도 익숙하 친근한 사람.
그런데 이렇듯 당혹스런 기시감은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 공포는 지하철이 막 출발한 다음, 지하철이 사라진 반대편 터널 쪽을 무연히 바라다볼 때 엄습하는 미지의 떨림과도 같다.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그 막막한 어둠과도 같다고 한다면, 아뿔싸! 나는 매일 세계의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수 백 개의 문들과 몸을 부비고 있는 게 아닌가.
지하철은 코스가 한정돼 있다. 설령 약간 다른 코스를 선택하더라도 창밖 풍경은 여지없이 어둡다. 가끔 지상으로 올라오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세계는 실물로서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지하철이 주는 공간적인 폐쇄성은 단순히 지상과 지하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그 폐쇄성은 공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체된 채 수평적으로 길게 늘어지는 시간 곡률의 문제이기도 하다. 현대도시에서 지하철은 일상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일상 바깥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무수한 암시와 상징을 제공한다. 지하 몇 백 미터까지 파고 들어가는 현대문명의 개발욕구가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현시해 내는 듯하지만, 세계가 확장하면 할수록 미지의 영역 또한 드넓어진다.
그러니 완전한 문명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문명의 야욕은 야만의 정복을 넘어, 되레 더 잔혹한 야만으로 곤두박질친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더욱 퇴보하는 불합리한 진보의 가장 극명한 구현물이 바로 지하철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환선이야말로 얼마나 극심한 악순환의 굴레인가.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는 건 우리의 삶이 일상세계의 암묵적인 명령체계나 시스템에 종속되어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일상적 삶의 존속을 위해 늘 지하철을 타고 악순환 속을 순환한다. 지하철 창밖에 떠 있는 흐리마리한 영상은 현실에서 이탈한 나의 분신에 가깝다. 그 분신이 자꾸 일상의 나를 이끌어 다른 차원 속으로 위치이동케 한다. 그것은 어쩌면 사회화 과정에서 이탈해 버린 또 다른 내가 외계의 침전물 형태로 스며든 과거의 찌끼인지도 모른다. 그 찌끼가 내게 개입하는 방식은 다름 아닌 성욕이다.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나는 유독 강해지는 성욕 때문에 애를 먹는다.
생면부지의 이성이 옆자리에 앉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바라본 고양이 눈빛처럼 명료한 신비가 몸 전체로 번진다. 이 살가운 냄새와 끈끈한 연대감은 과거에 살을 맞댔던 무언가가 불러일으키는 육체의 노스탤지어이자 맹목적인 조건반사다. 생전 처음 본 이 여자가 흡사 지난 밤 함께 뒹굴었던 사이인 것만 같다. 이 요령부득한 친밀감이 정도 이상 심해질 때, 자칫 치한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때문에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볼 수는 없다. 이럴 때 나는 정면 창밖을 응시한다.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목덜미 뒤 검은 유리창에 나와 내 옆자리의 여자가 동시에 비친다. 나도 그녀도 얼굴 생김생김이 명료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마땅히 시선 둘 데가 없으면서도 나름대로 안정된 폼을 유지한 채 타인의 얼굴을 훔쳐보는 건 이 도시가 저작해낸 흔해빠진 판타지 중 하나다. 이럴 때 나의 표정은 뭔가에 홀린 듯한 모습이다. 지하철 안의 나와 지하철 바깥의 내가 어느 동일한 지점에서 만나는 듯하다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어긋나 초점이 일그러진다.
그 둘이 끝끝내 공유하는 건 돌발적인 성욕으로 나타나는, 무언가에 대한 비릿한 흥분상태이다. 그것은 어느 특정한 대상을 갖지 못한 채, 저 혼자 자가증식하는 무한대의 에너지로 확장한다. 그 순간, 주위의 모습들은 세상의 다양한 일면들을 아무렇게나 떼어다 붙인 모자이크 필름처럼 여겨진다. 과거와 미래가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고, 지하철이 달리면서 내는 굉음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고딕 풍의 오케스트라처럼 장중하게 섞인다. 어둠 속을 관통하는 유난히 밝고 밀폐된 시간. 움직이면서도 고여 있는 정체와 분열의 공간. 그러면서 하나의 어둠을 지나 또 다른 어둠 속으로 잠행하는 현대의 유령선. 지하철 창밖에 도사리고 있는 저 영상은 혹, 과학문명이 낳고 암매장해버린 욕망의 사생아가 아닐까.
지하철 안에서의 성욕은 끝내 배출구를 찾지 못한다. 같은 길을 수 십 차례 순환하는 지하철의 운동 패턴처럼 욕망은 이 자그마한 육체의 회로 안에서 저 혼자 자발없이 부풀다가 역사를 빠져 나오는 순간, 짐짓 민망하고 곤혹스런 열패감만 안겨놓은 채 지상의 일사불란한 소음들 속에 붕 떠버린다. 그때의 심정은 밤새 마음을 쥐어짜 완성한 편지를 날 밝은 후에 다시 펼쳐 읽지 못하는 심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생면부지의 열망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몸 안에서 통제되지 못한 욕망은 터지지 못한 화산처럼 골수에 맺혀 분출되기만을 기다린다. 빛과 열기를 한데 모아 기어이 불타버리고야 말 검은 소실점. 대낮에 불거져 나온 어두운 욕망과 산채로 암장되어 부활을 꿈꾸는 존재 바깥의 시간들. 그것들은 현대의 삶이 유실해 온 끔찍하고도 측은한 자아의 이형(異形)들이다.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타고 온 지하철이 길고 긴 꼬리를 잽싸게 감추며 사라지는 반대편 터널을 한동안 바라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쓰라리다. 채우지 못한 갈증이나 부질없는 미련 따위가 아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어느 괴물이 가슴 위를 쓸고 지나간 것만 같다. 문득 한 여자의 태몽을 대신 꾸었던 때가 떠오른다. 내 몸을 가로지른 다음 침대 밑으로 몸을 숨기던 그 흰 뱀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다. 그 뱀이 아직 채 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내 의식의 끄트머리에서 느릿느릿 꼬리를 흔들고 있을 무렵, 불현듯 눈을 뜬 내게 또 다른 표정의 내가 선명하게 떠올랐었다. 오금에서 뒷덜미까지 빠른 속도로 몸을 거스르던 그때의 차가운 핏줄기가 지금 다시 느껴진다. 비좁은 터널 속으로 재빨리 사라져 가는 지하철이 내 무의식 깊은 늪지에서 동면하던 그 뱀이었단 말인가. 아무래도 열에 달뜬 내 몸을 열고 대가리를 쑤셔 박은 이 현대판 이무기가 나를 겁탈한 것 같다. 불현듯 입을 열면 전조등을 시뻘겋게 밝힌 지하철이 달려 나올 지도 모른다. 이럴 수가. 내 불편부당한 성욕이 나를 잡아먹었다. 나는 지하철을 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지하철을, 임신했다.
시간과 공간의 축을 일거에 무너뜨리며 다른 차원의 세계로 우리를 몰아가는 몇 개의 이미지들이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통시적으로 환유하는 구조체계가 있다. 문명화된 인간일수록 그 구조적 억압기제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문명인이 된다는 건 몸 안에 전체 구조와의 연결선을 매달아 마리오네트가 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지하철 창밖에 비친 내 모습은 그러므로 마리오네트로서의 나를 구경하는 구조 바깥의 어떤 이물이다. 마리오네트를 움직이는 건 의식의 최하층까지 침투해 있는 세상의 모든 의미체계들이다. 돈일 수도 있고, 신일 수도 있고, 나라고 착각되어지는 어떤 기계의 부속물일 수도 있다. 현대도시의 구조적 결과물로서의 지하철과 구획된 어둠 사이에 끼인 중간자로서의 허상. 나는 오늘도 지하철을 타고 가며 내 바깥에 있는 내 모습을 본다. 그건 사랑과 연민과 능멸이 범벅된, 비틀린 자아의 이면이다.
(2005.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