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그냥 얼굴에 ‘끌린다’ |이원|

사람과 만나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내 습관이다. 나는 마치 그곳에 존재하는 유일한 풍경인 듯 얼굴을 쳐다본다. 체질적으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날 때도 허공을 두리번거리는 그 얼굴을 기어이 쫓아가서(!) 뚫어져라 본다. 대화를 할 때는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만들어내는 무언의 말을 따라간다. 말보다 얼굴을 더 믿는 까닭이다. 사람의 얼굴을 거두절미하고 쳐다보는 탓에 오해를 사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누군가와 만나서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너무 좋거나 너무 싫을 때 뿐이다.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할 때도 가장 좋아하는 것은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는 일이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인양 너무 골똘히 쳐다보기 때문에 불쾌해하거나 난처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아는 사람도 그런데 모르는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이들만이 자신의 얼굴을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일그러뜨려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해준다.
내가 얼굴을 골똘히 쳐다보는 것은 화가들처럼 표정의 관찰이나 탐구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그냥 얼굴에 ‘끌린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평생 동안 집요하게 얼굴을 그리는 일에 매달린 화가다. 고름처럼 흘러내리면서도 지워지지는 않는 그 얼굴에서는 언제나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그 얼굴을 가리켜 질 들뢰즈가 ‘머리-고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었던 것은, 몸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얼굴이기 때문이다(몸의 존재방식으로서의 얼굴에서는 생존의 피비린내가 가실 수가 없다). 베이컨의 손이 그린 얼굴이 몸의 존재방식이라면, 나는 영혼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얼굴에 끌린다고 할 수 있다.
얼굴은 분명 몸이라는 생물학적, 물리적 공간의 일부로서도 존재하지만, 그 공간에서 닳아가는 시간으로도 존재한다. 얼굴은 벼랑에 새겨놓은 글씨처럼 닳아가지만, 지나간 시간들도 얼굴 안에 다 들어 있다. 그러므로 얼굴을 쳐다보는, 아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순간은, 한 사람의 온 시간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며, 닳아서 만들어지는 영혼의 만다라를 보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 흐느끼지 않는 얼굴은 없다.
타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과는 달리 곁눈질로라도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두려워진다. 어려서는 거울 속에서 재미있는 장난감으로서의 내 얼굴과 마주쳤던 것 같고, 그 후 상당 기간은 성장과 치장을 확인하는 내 얼굴과 마주쳤던 같다. 그러나 귀동냥으로만 들었던 ‘얼굴에 다 담으며 간다’는 말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감지하면서부터는 한밤중에만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어둠이 가려주면 조금은 덜 적나라할 것이라는 허술한 자기 위안에서다. 나는 풍화되어가는 시간의 벼랑인 내 얼굴을 정면으로 볼 자신이 아직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삶이 보편적 세계의 가치와 맥락에서 탈주할 때, 탈주해서 다른 세계를 스스로 마련할 때, 얼굴은 몸의 존재 방식에서 비로소 영혼의 존재 방식으로 바뀐다. 한국인의 표준 얼굴, 한국인이 선호하는 얼굴, 잘 생긴 얼굴, 예쁘게 생긴 얼굴 등등이라고 언급될 때의 얼굴이란, 만다라가 없는 무미건조한 얼굴이다. ‘좋은 얼굴이다’ ‘잘 늙은 얼굴이다’, 이런 표현이 대중적 삶에서 탈주한 비로소 얼굴같이 된 얼굴에 해당한다. 이런 얼굴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이 속에 영혼이 깃든 얼굴들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얼굴’은, 많은 곳을 돌아다닌 화려한 흔적보다는, 고집스러워서 불편해보여도 내내 한곳을 욕망하고 있는 엄격한 얼굴이다. 칠이 벗겨진 벽처럼 남루해보여도 사라지지 않는 한곳의 신명을 중력으로 받고 있는 얼굴이다. 부처가 좋은 얼굴인 것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된 자만이 갖는 미소가 드리워져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잣대로 본다면 ‘무용’한 곳에 자신의 중력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내게 부처는 그렇게 보인다.
거울에서 오래 울고 난 뒤의 내 얼굴과 기습적으로 마주친 적이 있다. 나는 그때의 내 얼굴을 휴대폰의 카메라로 찍어 한동안 휴대폰의 배경으로 깔아놓았었다. 나르시시즘의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닿고 싶은 얼굴의 기슭이 거기 어딘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퉁퉁 붓고 새빨개진 그 얼굴은, 어느 미술평론가의 표현을 빌린다면, ‘기계-무당’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식으로 거친 해석을 한다면, 기계의 엄격함과 무당의 무용의 신명이 그 얼굴에 동시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규칙 밖으로 나가는 순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기계의 운명을 그리고 신명을 인간인 내가 갖고 싶은 것이다.
(200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