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다시 이인성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며 |최애영|

― 대산문화재단 번역지원 수혜 소감
먼저 이 자리를 빌어 또 다시 저의 번역 작업을 지원하기로 결정해주신 대산문화재단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호감을 갖고 저의 원고를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방금 저는 ‘또 다시’ 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년 전에 이인성의 소설 <<낯선 시간 속으로>>의 번역을 위해 대산재단의 지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처음 한국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로 결심한 터라, 저는 이 분야에 경험이 있는 분들에게 조언을 부탁했었습니다. 그 분들은 두 가지 사실을 당부해주었습니다. 먼저 수용어권 원어민 공역자의 문학적 역량과 성실한 태도가 성공적인 번역을 위한 결정적인 열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품 선택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문학성은 물론이고 잘 팔릴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조건을 들으면서, 저는 내심 저 자신이 매우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공역자는 프랑스 문학교수이자 문학비평가로서 활동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출판한 경력이 있는 분이시며, 그 분의 유려한 문체와 섬세한 감수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성심을 다해 저와 함께 작업해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조건을 들으면서, 동시에 이미 번역하기로 결정해둔 이 작품을 생각하면서, 과연 저의 선택이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 것일까 하고 잠시 질문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문학에서 이인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확고합니다. 그의 문학 세계가 지니는 독창성과 한국문학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능숙하고 매력적인 이야기꾼으로 알려지기를 거부한 소설가입니다. 게다가 그의 소설 세계는 혁신적인 글쓰기 시도로 인해 매우 난해하기까지 합니다. 결코 그를 대중적인 소설가라 할 수는 없습니다.
적절한 작품 선택이 중요한 것은 번역해야 할 작품들이 수용언어권의 대중과 만나는 데 성공해야만 한국문학이 그 언어권에 잘 정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대중적인 작품부터 우선적으로 소개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분명 일리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이인성의 혁신적인 면모와 비교될 만한 문학 경향이 2차 대전 이후로 약 20여 년간 문단을 지배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보 로망’이라 불리는 신소설 경향입니다. 그 소설가들은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 모험에 뛰어들면서 문학을 통한 현대적인 세계 인식의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그 결과, ‘누보 로망’의 시대가 마감된 후에도, 그들로부터 자극을 받은 후세대 소설가들 글쓰기 탐구는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이제는 과거의 방식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을 정도로 프랑스 문학은 엄청난 진화를 겪었습니다. 그러한 맥락을 떠올리면서, 저는 이인성과 프랑스 문학이 만나는 접점은 분명 존재하며, ‘누보 로망’ 계열의 작가들과는 달리 이인성은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작가라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 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말은 언제쯤 한국문학이 노벨문학상을 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문단이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노벨문학상을 타는 문인이 누구든 간에 그 상은 한 개인이 아닌 한국문학 전체에 대한 평가라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문학이 얼마나 진화를 겪었고,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성하는지를 세계에 보여주지 않고서는 결코 그러한 성과를 올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저는 저 자신이 먼저 이인성의 소개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다시 이인성의 소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을 번역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번역자와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하는 공역자의 공동 작업은 그저 문장 교정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단순한 작업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 문화의 만남, 충돌까지 포함한 만남인 것 같습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공역자를 위해, 저는 문체나 어조를 비롯한 작품의 특징들뿐만 아니라, 작품을 읽으면서 느끼고 텍스트 속에서 연상되는 사건이나 단어나 표현들, 그리고 한국 문화의 맥락 속에서 연상되는 텍스트 바깥의 것들까지 각주로 전달합니다. 그리고 저의 공역자는 제가 제공한 자료들을 토대로 저의 텍스트를 자신의 프랑스어로 새로 씁니다. 그 다음, 우리 두 사람은 한 자리에 앉아 각자의 텍스트를 읽습니다. 공역자가 읽어주는 프랑스어 텍스트를 들으면서 저는 눈으로 한국어 텍스트를 확인합니다. 소통이 잘 이루어졌을 때에는 구태여 단어 하나하나 체크하지 않고서도 원-텍스트가 저절로 느껴집니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왜 수긍할 만한 수준에서 두 텍스트가 겹쳐지지 않는지를 함께 논의합니다. 이 순간에 종종 두 문화 사이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문화적인 차이가 두 텍스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도록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이들이 부각시키는 난점들 가운데 특히 두 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이 대립될 때가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각 어휘 체계 속에서 의미망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차라리 쉬운 일인 것 같습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소위 ‘교착어’로 분류되는, 다시 말해 의미의 논리적 맥락을 따질 필요 없이 구문이나 문장을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특성을 지닌 한국어와 철저하게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프랑스어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에 있습니다. 한국어에서는 모호하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표현이 프랑스어로 옮겨졌을 때에는 아주 논리적인 표현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번역된 텍스트의 첫인상이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번역의 그러한 문체적 한계를 수긍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것에 저항해야 하는지, 할 수 있는지, 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문학 텍스트는 결코 그러한 문체적 특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며, 그것을 단순한 의미전달체로 축소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 인식을 재현하는 언어적 형태이며, 그 인식의 틀이 빚어낸 생각과 느낌과 감각의 축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와 마주한 인간의 이야기인 만큼, 우리는 요소들 사이의 조화만큼이나 긴장, 모순 혹은 갈등 또한 첨예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는 그러한 생각의 축조 차원에서 두 언어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고, 그를 통해 문체상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할지라도 어느 정도 보완은 하고자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자주 고민합니다. 저의 공역자를 지나치게 구속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그의 상상력에 지나치게 많은 자유를 주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저의 노력이 무모하거나 빈약한 몸짓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대산재단의 지원을 받게 된 이 순간에 저는 다시 긴장하게 됩니다.
저의 소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글은 대산문화재단 번역지원 증서 수여식(2005. 8. 24.)에서 수혜자 소감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성된 것임.

(2005.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