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무종교주의자와 노동 |김숨|

내 아버지는 무종교주의자다. 여태껏 종교를 가진 적이 없으며, 종교에 기대 평온을 갈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종교의 축복(설사 그것이 박해라고 할지라도)을 누리지 못한 아버지에게 기꺼이 종교가 되어준 것은 ‘노동’이었다. 아버지가 평생을 믿고 의지할 대상이라고는 오직 노동! 노동밖에는 없었다.

아버지는 노동을 구하기 위해 중동의 사막으로까지 가야 했던 분이다. 아마도 그 시절 중동의 사막밖에는 아버지에게 온전한 노동을 허락하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노동’이라는 단어조차 모르던 어린아이였던 나는, 아버지가 사막에서 보내오는 양탄자며 옷가지들을 받고 마냥 좋아했다. 헌데 노동밖에는 매달릴 것이 없던 내 아버지에게도 백수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는 5년여를 중동에서 있었고, 중동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수가 되었다. 노동을 하지 않고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피폐해져 갔다. 아버지의 기억력과 청력과 머리카락들이 흐려진 것도, 노동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던 그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무려 5년 동안을 (중동에서의 5년과 백수로 지내야 했던 5년은 물리적인 시간으로 따지자면 같겠지만, 아버지에게는 확연히 그 두 시간의 깊이가 달랐을 것이다.) 백수로 지내다가 분연히 중고 ‘트럭’을 한 대 샀다. 야밤에 도망치듯 이사를 가야 했던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날라주고 돌아오던 아버지의 트럭 적재함에는 밴자민 화분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이사를 가며 버리고 간 화분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만 한 화분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으셨다. 떳떳한 노동이 주는 충만과 고단함이 아버지의 웃음에 그물처럼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미처 그것을 읽어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트럭을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실하게 이삿짐을 날랐다. 어느 날인가는 나무책장을 주워오기도 했고, 초콜릿빛깔의 침대를 주워오기도 했다. 내가 최초로 갖게 된 나무책장과 침대는 이를테면 아버지가 이삿짐을 날라주고 주워온, 버려진 물건들이었다.

아버지는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껏 트럭을 몰고 다니며 이삿짐을 나른다. 이삿짐을 나르지 않는 날에는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며 칡뿌리나 버섯을 캔다. 아버지는 손과 발을 무위(無爲)로 놀리는 것을 죄악이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일상은 노동을 중심을 철저하게 짜 있다. 아버지는 노동을 하기 위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노동의 고단함을 망각하기 위해 소주를 마신다.

나는 며칠 전 강남 고속터미널상가에 천을 떼러 갔었다. 일요일이라 상점의 대부분이 굳게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미로 같은 통로들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단 한 곳, 문을 연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초로의 남자가 환하게 형광등을 밝혀 놓고서 천들 속에 파묻혀 미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자들은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 그 시간에 초로의 사내는 미싱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초로의 사내는 평생을 미싱에 바쳐왔을 것이다. 초로의 사내에게 초콜릿색의 두꺼운 천을 사가지고 돌아오면서 나는 슬프다, 는 생각을 했다. 초로의 남자가 기도를 하듯 찬송가를 부르듯 미싱을 돌리는 한 평 남짓한 그곳에서 나는 닳고 닳은 검은 경전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멀리 하지 못해 안달하는 편에 속하는 자식이다. 나는 아버지가 불편하다. 아버지가 무종교주의자라는 사실은, 그리고 노동밖에는 매달릴 대상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리고 내게는 현재 종교가 없다. 성경의 잠언들과 경건을 경외해마지 않지만, 어쨌든 내게도 종교가 없다. 그렇다고 내 아버지처럼 노동을 종교처럼 섬기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노동을 종교처럼 의지하고 살아온 아버지 밑에서 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좀더 사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소설을 쓰는 행위가 노동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 ‘죄악’이라는 단어를, 벼락을 맞듯 떠올리기도 한다.

오래 전 아버지가 얻어온 밴자민 화분은 여태도 부모님의 집 거실 한구석에서 멸치 떼 같은 잎들을 띄우고 있다.
(2005.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