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칼럼] 봄, 죽음의 매장 |김기택|

지난 12월 추위는 대단했다. 1973년 이후 33년 만에 가장 기온이 낮은 달이었다는 기상청의 발표도 있었다. 서울 기준으로 기온이 최저 영하 14도에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인 날도 있었다. 그날 밤은 방바닥이 뜨끈하도록 불을 땠지만 꼬챙이 같은 추위가 달그락거리며 벽을 쑤셔대는 것 같았다. 벽을 뚫고 들어온 냉기 때문에 발바닥은 따뜻해도 몸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전봇대에 달린 알전구의 외등 불빛은 추위의 완력에 둘러싸여 전구 밖으로 퍼져나가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리알 안에서 불빛을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것이 전봇대를 감나무로 알고 잘못 매달린 홍시처럼 보였다.
그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나무들은 벌거벗은 채로 서 있었다. 나무들의 냉혈이 진저리쳐질 만큼 단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추위에 견디는 몸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스스로 옷을 입을 수도 없고 따뜻한 곳을 찾아 이동할 수도 없는 나무는 가혹한 추위 앞에서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을 것이다.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것, 바위처럼 무뚝뚝해지는 방법 말고는 이 길고 독한 추위를 견딜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나무는 제 안의 모든 생명활동을 중지하고 하나의 바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매해 반복해온 죽음의 통과의례를 올해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 형체가 없는 꽃이나 잎을 거북이처럼 두꺼운 껍질 속에 집어넣고 난폭한 맹수 앞에서 나무는 죽은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잎 하나 없이 눈을 뒤집어쓰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은 나무의 형상은 고체로 된 불길 같았다.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추위에 나무는 깊은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 화상에 견디는 방법은 스스로 냉혈의 불길이 되는 것. 얼음의 불길로 타오르는 채 정지해 있는 것. 바위처럼 단단한 불길이 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살 속에 겹겹이 동그랗게 새겨진 ‘지옥에서 보낸 한 철’들 바깥에 다시 한 줄 새로운 죽음의 선을 그리는 것.
J.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의하면, 수목을 숭배하는 고대인들은 겨울이 되면 식물이 죽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부활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산풍요를 위하여 매년 봄에 죽음을 추방하고 봄을 부활시키는 의식을 행했다.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서 헤진 의복을 입혀 강물에 버리거나 밭에 버리는 등 ‘죽음의 매장’ 의식을 통해 겨울의 죽음을 죽이고 봄의 생명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고대인들이 숭배했던 아도니스(Adonis)나 아티스(Attis)는 매년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소생하는 식물신이다. 그들은 곧 매년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식물의 신격화이다.
나무들은 아직도 고대의 시간을 살고 있다. 그들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추위를 맞고 죽은 듯이 있다가 꽃과 잎으로 그 죽음을 매장시킨다. 그들은 한 몸으로 매년 삶과 죽음을 겪는 생사동체(生死同體)이다. 그들이야말로 살아있는 선사 시대의 유물이다. 나는 그 오래된 시간을 보고 있다. 그 오래된 시간도 또 다른 오래된 시간인 나를 보고 있다. 자신이 오래된 시간인지를 오래 전에 망각한 나를, 스스로를 진보된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나를, 박물관의 선사시대관에서 원숭이처럼 열등하고 신기한 시간을 보듯이 나무를 보는 나를, 보고 있다.
기온은 영하이지만 이젠 봄기운이 완연하다. 꽃이 피기엔 이르지만 가지들은 탱탱해 보인다. 그 나무들을 보는 내 몸에도 죽었다가 산 흔적인 나이테가 그려져 있는 것 같다. 죽음을 여러 번 매장시켰던 꽃의 흔적들이.
(2006.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