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데자-뷔 |심재상|

I
검붉은 냇물 한복판의 물보다 더 검은 저 한 점 얼룩은 소다 코끝만 내놓은 채 잠길 듯 떠내려갈 듯 흙탕물을 헤쳐 나가는 한 마리 흰 소다 갈퀴도 없는 두 가닥 발굽으로 열 겹 스무 겹 수초처럼 엉겨드는 두터운 물살의 장막을 하염없이 찢어내고 있는 눈 먼 소다 고요한 용틀임만으로 넘실대는 죽음의 푸른 힘줄을 툭툭 끊어낼 듯 정말 끊어낼 듯 온몸으로 안겨가는 미친 소다

II
돌이킬 수 없는 것은 돌이킬 필요가 없는 것이어야 한다, 고 혼잣말처럼 당신이 말할 때 당신의 그 나직한 표정 그 버거운 목소리가 나는 슬펐다 왜 길은 언제나 또 다른 길에 닿아 있는지 어째서 꾸역꾸역 길을 잡아먹으며 걷는 동안에도 우린 너나없이 또 다른 길의 홀씨를 민들레처럼 허공에 흩뿌려대는지 가지런히 길을 따라오는 나직한 밭이랑들 다소곳한 둔덕들을 뒤덮은 검은 비닐 아래서 시뻘겋게 자신을 태우는 탱탱한 바랭이 줄기들 말라비틀어지는데 필요한 만큼의 뜨거움이 아직 우리에게도 남아있는지

III
어리석음은 반복된다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의 두께 그 두터운 살집의 권위로 반복된다 누렇게 바랜 몸뚱이를 바람벽에 들러 붙인 채 시도 때도 없이 귀를 쫑긋대는 ‘빈방 있음’ ‘급히 돈 쓰실 분’ ‘개조심’ 광기는 반복된다 한번 물리면 거듭 물리게 된다 꼬나문 담뱃불 입술을 지져 들어와도 송곳처럼 매운 연기 마른 눈을 후벼 파 들어와도 한번 찔러 넣은 바지주머니에서 끝끝내 손 뺄 수 없게 된다
(2006.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