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사랑의 지형학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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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머리카락은 검은 강물이다. 너를 쓰다듬을 때면 내 손에서 네가 흘러간다. 그때 내 손의 마디는 수위표(水位標)이다. 아, 나는 네게 이만큼 잠겼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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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에서 수수께끼를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① 둘은 서로가 더 오래 살면서 서로가 죽어있는 것을 본다. ② 그들의 이름은 그들 자신에 대한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대체한다. ③ 둘은 그들을 분리시킨 것으로 결합되어 있다. 생사와 이름과 이합(離合)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로 녹아든다. 그것들은 모두, <사랑>의 마지막 발음 그 둥근 자음 안에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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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 요새는 늘 새벽에 잠이 깨인다.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낀다. 아무 의욕도 안 느끼는 무기력의 극치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알코올에의 욕망만이 강하게 치솟는다. 아무것에도 아무 곳에도 안주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개탄스럽다. 아무 직업에도 질긴 욕망을 못 느낀다.” 전혜린 일기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일기란 것이 원래 제 안에 대고 하는 말이라, 제 마음을 공명통 삼아 자꾸 증폭되게 마련이지만, 이 예민한 사람은 같은 고통도 훨씬 더 심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나 같으면 “새벽에 자꾸 잠이 깬다. 너무 낮잠을 잤나보다. 술 먹고 싶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고 썼을 것이다. 내 글이 경제적이긴 하지만, 전혜린에게서 아픔을 느낀 이들이 내 일기를 본다면, “그래 술이나 먹어라!”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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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은 소용돌이다. 손을 잡을 때마다 우리는 타인의 격정에 휘말린다. 게다가 격정을 떠나왔어도, 흔적은 남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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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촌 간판을 본 일이 있는가? 대개는 과부촌의 ‘부’자 대신에, 부채를 그려 넣었다. 그게 욕망의 환유다. 드러내면서 숨기기. 어사출두 후에 이몽룡도 춘향이 앞에서 그렇게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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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왜 나를 떠나가게 했나요?” 이은하가 묻는다. 떠난 건 그대인데, 내가 왜 이 불편한 사동문(使動文)의 주어가 되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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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온다. 혀는 붉고 뜨겁다. 잠시 몸속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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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내밀한 것이 아니며(누구나 고백을 한다),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고백을 주고받았다), 특수한 것이 아니다(모든 고백은 동일한 문형을 갖는다). 고백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게 슬프다(아마 슬픔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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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은 틈입의 상징이다. 당신은 모든 방향에서 내게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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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에게는 32길상(吉相)이 있다. 여러 번 생을 거듭하는 동안에 쌓은 선한 원인이 선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몇 가지 놀라운 특징을 옮겨 적는다: 발바닥이 땅에 착 붙어, 발과 땅 사이에 틈이 없다(足下安平立相: 요샛말로 평족이라 한다, 이런 발을 가진 사람은 군대 가기 어렵다);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 얇은 막이 있다(手足指 網相: 지느러미 같은 것이다, 수영하기에 좋을 것이다); 몸을 바로 세워 서면 손이 무릎에 닿는다 혹은 키와 팔의 길이가 같다(正立手摩膝相, 身廣長等相: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모습이 여기서 유래했다); 몸에 난 털이 모두 위를 향해 있다(毛上向相: 지하철 환풍구 위를 걸어가는 사람을 생각하면 된다); 전신이 금빛이다(金色相: 그렇다고 땀 흘리는 황인종을 생각해선 안 된다); 겨드랑이 밑에 살이 있어 도독하고, 어깨가 둥글며, 두 볼이 사자처럼 도톰하다(兩腋下隆滿相, 肩圓好相, 獅子頰相: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는 이들은 그 마음을 버려야 선한 열매 셋을 얻을 것이다); 치아가 40개이며, 모두 똑같이 생겼다(四十齒相, 齒齊相: 틀니를 상상하면 된다); 혀가 부드럽고 얇으며 크고 넓어서 내놓으면 얼굴을 덮으나 집어넣으면 입 속에 다 차지 않는다(大舌相: 부침개를 입안에 넣고 다닌다고 상상하면 된다). 역시 선업(善業)을 쌓으면 욕망에서 자유롭게 된다. 최소한 다른 이가 품은 욕망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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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미적 판단이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인식론적 판단과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도덕적 판단과는 구별되는 자율적 영역임을 주장하였다. 근대의 체험은 이처럼 진선미(眞善美)의 영역이 분화되는 체험이다. 미스코리아에서도 진선미를 따로 뽑으니까, 맞는 말일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 여자 혹은 저 남자 멋진데, 라는 말속에는 진리도 도덕도 없다는 거다. 매혹에는 비교급과 최상급이 없고 3음보나 4음보도 없고 논증과 증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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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옷은 오른쪽이 아래에 있고 여자 옷은 왼쪽이 아래에 있다. 그래서 옷을 입거나 벗을 때 남자는 오른손잡이가, 여자는 왼손잡이가 유리하다. 여기서 어떤 억압을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가 더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다. 당신은 그 사람과 길을 갈 때에 오른쪽에 서는가, 왼쪽에 서는가? 다르게 말해서 당신은 그 사람의 안쪽을 보고 있는가, 바깥쪽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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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담고 싶은 내 마음이 터진 봉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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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육점과 사창가에서 붉은 전등을 켜놓는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싱싱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말도 못할 슬픔이 거기에 있다. 끝내 가지 못하는 것, 그게 그리움의 속성이다. 홍등(紅燈) 먼 곳의 불빛을 살[肉]의 일로, 그것만으로 알린다는 것. 한 사람이 가진 식욕과 성욕 중 어느 게 더 큰지는 그곳에 출입한 횟수가 일러줄 테지만, 끝내 가지 못하는 곳이 또한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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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가만 보니/꽃대가 흔들린다//흙 밑으로부터/밀고 올라오던 치열한/중심의 힘/꽃 피어/퍼지려/사방으로 흩어지려//괴롭다/흔들린다”(김지하). 여기에 김지하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 전부가 걸려서, 흔들린다. 그는 살아온 이력을 모두 걸고서 ‘중심의 괴로움’에 관해 말했다. 큰 시인에게는 말하기 민망하지만, 사실은 밤마다 새벽마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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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 태양을 상징하는 짐승이고, 소는 달을 상징하는 짐승이라고 한다. 갈기가 태양빛을, 뿔이 초승달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갈기는 밖으로 뻗쳐나가고 뿔은 날마다 자란다. 상징이란 본래 실재와 표현의 간격을 전제로 한다. 갈기도 뿔도 빛을 내지는 않는다. 그리움 역시 상징과 같은 형식이다. 내 몸은 여기에 있는데, 내 마음은 거기에 있다. 여기와 거기 사이의 간격을 억지로 잇는 것, 그게 그리움이고 상징이다. 소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고 싶어 하는 것이 사자의 사랑이며, 사자의 옆구리에 숨구멍을 내고 싶어 하는 것이 소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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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狼)과 패(狽)는 둘 다 이리를 이르는데, 하나는 앞발이 길고 뒷발이 짧아서 뒤뚱대고 또 하나는 앞발이 짧고 뒷발이 길어서 절룩댄다고 한다. 둘을 합쳐 허둥지둥 대는 모양을 이르는 말로 삼았는데, 전하여 난감한 처지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난감해지면 허둥댄다, 그걸 낭패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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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팔자의 차이: “오, 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이건 운명이야.” 이렇게 말하던 사람도 헤어진 후에는 달라진다. “쳇, 또 가버렸군, 아이고, 내 팔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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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 떠낸 자리에 서둘러 다른 물이 모여든다. 사람이 뜯어간 상처를, 약수(藥水)가 슬슬 문질러, 고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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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을 따라 걷다보면 휘어진 길 저쪽에서,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의 커브, 돌고 돌아 네게로 간다는 것.

(2006.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