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물거품 메모리와 보온병 |김중혁|

1.
잠을 잘 자야 건강하다는 말을 듣고 첨단 소재로 만들었다는 메모리 폼 베개를 구입했다. 홈쇼핑에서 배달되어 온 베개에는 다음과 같은 전단지가 한 장 첨부돼 있었다.

“하중을 흡수하고 원상회복할 수 있는 첨단소재 메모리 폼으로 만들었습니다. 메모리 폼이란? 물리학 공식으로 ‘F=ma’, 가속도가 100m/s일 경우 70kg의 사람이 받는 중력은 7톤이나 됩니다. 이때 우주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신체의 부위에 전달되는 위험한 하중을 흡수하고 원상회복할 수 있는 첨단소재로 NASA의 과학자들이 발명한 것이 저탄성, 고밀도, 충격흡수, 첨단소재인 ‘Memory Foam’입니다.”

베개 하나를 설명하는 문장치곤 꽤나 거창하다. 게다가 모호한 구석도 많다. ‘이때 우주인을 보호하기 위하여’라고 적혀 있는데 이때라는 건 언제인지, 또 어째서 지구인이 아니라 우주인을 보호한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베개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이모조모로 갖은 애를 다 썼다는 느낌은 확실히 전해진다. 직접 베개를 써보니 안정감이 있긴 했다. 보호되고 있다는 기분도 언뜻 들었다. 정말 원상회복이 되는지, 정말 충격을 흡수하는지 여러모로 눌러봤는데 설명이 그럭저럭 맞는 말이구나 싶다. 어떤 원리로 다시 제 모양을 찾아가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베개를 쓰고 난 후 전단지를 다시 훑어보다가 ‘Memory Foam’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물거품 기억’이라니, 정말 그런 이름일까? 애써 베개를 머리로 눌러놓았더니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아오고야 말아서, 베개에 눌러놓은 그 기억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일까? 아마도 ‘Memory Form’을 잘못 쓴 것이겠지만 ‘물거품 기억’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2.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희한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함께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은 세세하게 기억해내지만 뭔가 좋지 않았던 기억은 머리 속에서 깡그리 지워버리는 사람이다. 예전 일을 함께 얘기할 때면 속이 터질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사람의 뇌야말로 첨단소재로 만든 제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자신으로 – 메모리 폼이 자신의 형태로 되돌아오듯 –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나빴던 기억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언제나 평온한 뇌를 유지할 수 있다니, 정말 부러운 뇌가 아닐 수 없다.

3.
어떤 여론 조사기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발명은 무엇일까요?”라는 설문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노인이 이런 답을 했다. “내가 생각하기엔 보온병 같습니다.”
여론 조사자는 당황했다. 무수한 사람에게 질문을 했지만 보온병이라는 답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노인은 덧붙였다.
“보온병은 찬 것은 차게, 뜨거운 것은 뜨겁게 보존하지 않소. 그런데 보온병이 어떻게 그걸 아는 겁니까? 난 정말 그게 신기하답니다.”

4.
가끔씩 나 자신의 기억을 편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에 대해 여러 번 얘기를 하다 보면 내가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 사건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내 기억에 대해 이야기했던 순간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인지, 내 기억을 재생했던 여러 개의 판본을 종합하고 있는 것인지 모호할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최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애를 쓰지만 이미 나의 기억은 변질돼 버린 후다.

5.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메모리 폼으로 만드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내가 언제나 나일 수 있도록, 내가 변형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나는 완성된 내 글이 보온병 같은 것이길 바란다.
(2006.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