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헬로, 키티 |방현희|

내가 아는 친구 중 하나가 말한다. 내가 집에서 입는 옷은 거의 다 ‘헬로, 키티’야. 그러자 다른 친구가 얼른 말을 받는다. 우리 딸 책상에는 ‘헬로, 키티’로 가득해. 나도 웃으며 끼어든다. 우리 집 강아지 머리끈도 ‘헬로, 키티’야. 그걸 본 미국에서 온 어린 여자애가 자기 머리끈을 보여주며 세임, 이라고 하더라. 여자애들은 하루라도 문방구점을 들르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진다. 채울 것도 없는 다이어리는 이미 수십 개를 가졌고 캐릭터가 달린 머리핀과 수십 개의 색색가지 펜, 여기저기 붙인 스티커들을 가져야 마음이 놓인다. 여자애들의 동선은 동네에서 가장 큰 문방구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마흔 넘은 여자도, 이제 십대에 접어든 어린 딸도, 강아지도, 이국의 여자애도 같은 캐릭터 상품을 소비한다.

<모노폴리>라는 영화에서 양동근은 은하철도 999의 메텔을 좋아하며 액션 피겨를 모으는 취미를 가졌고 장난감으로 방안을 가득 채우는 청년이다. 양동근이 보여주는 소년의 세계는 흥미롭다. 어눌한 말투와 상황에 맞춰 적절히 바꾸지 못하는 어설픈 표정은 아직 성인의 태도를 체득하지 못한 사춘기 소년의 이미지이다. 그는 때로 어른들의 세계를 조롱하며 때로 어설프고 유치하지만 결국 모두가 잃어버린 유희를 위한 유희를 되찾게 한다. 양동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잃어버린 순수한 시대를 함께 그리워한다. 드라마도 예외가 아니다. 시골 순진녀와 정신 연령이 낮고 순수한 성인 남자를 보며 안온했던–안온했으리라 믿는– 과거를 추억한다.
오랜 세월동안 자녀와 공감대를 이룰 수 없었던 부모들은 이제야 겨우 같은 채널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미키 마우스 티셔츠를 입고 엽기토끼를 안은 채 같은 드라마를 보며 정우성과 문근영과 춘향이에 열광한다. 아들과 아버지는 로봇 태권브이 프라 모델을 만들며 하루를 보낸다. 그들의 선반에는 함께 만든 각종 전투기와 태엽로봇과 병사들이 즐비하다.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은 이제 어린애들만의 놀이가 아니다. 그들은 비로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놀이를 만나서 행복해한다. 성인의 질서란 것에서 성인 역시 벗어나고 싶어하므로.

‘키덜트 코스메틱’ 여자 어른들은 어릴 때 꿈꾸던 공주풍의 화장품을 구입한다. 화려하고 깜찍한 모델의 안나 수이가 대표적이지만 디올이나 비오템, 에스티 로더도 가세하고 있다. 어린 여자들은 어른에 대한 환상을 간직한 화장품을 원한다. 상상속의 어른이 되어보는 것, 그것은 자유롭게 여러 모양으로 변할 수 있는 능동성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잘 지워져야 하는 특성이 있다. 이들은 오히려 아이 같은 포장보다 적당히 어른스러운 포장을 원한다. 립스틱과 블러셔를 바르면 근사한 남자와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질 것만 같다.

‘도리도리 인형’과 ‘스마일 볼’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심심해지면 스물아홉 살 여성은 남자친구가 사준 도리도리 인형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말을 건다. 매일 티격태격하는 이 남자와 헤어질까? 인형은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그럼 계속 만날까? 인형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스물일곱 살 남성은 화가 날 때마다 여자친구가 사준 스마일 볼을 들고 묻는다. 야, 부장을 받아버릴까? 그러면 스마일 볼은 답을 준다. No. 정말 못해 먹겠다, 그만 둘까? 라고 말하면 볼은 또 대답한다. Chances aren’t good. 식사시간에도 볼을 꺼내들고 묻는다. 자장면? 짬뽕?
수시로 생기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젊은이들은 휴대 가능한 개인용 팬시용품을 꺼내들고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지? 라고. 사소한 결정은 도리도리 인형에게 미뤄버리고 자신은 중요한 순간에 가장 적절한 결정을 내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키덜트 문화’는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경쟁위주의 현대 사회에 저항하는 심리에 호소하고 있다. 그것은 우선 어른들이 하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이 깔린 영역에 분포한다. 컴퓨터나 화장품, 장난감 매니아들은 지속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하며 자신의 취향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각각의 취향에 맞는 상품에서 어린 시절의 향수를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다. 사십 대 여성은 헬로 키티 옷을 입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으며 자신의 유치함을 당당히 드러낸다. 어린이들은 ‘조기 성인화’되어 자신들만의 홈페이지를 만들고 음악 채널을 소유하며 <여고생 시집보내기> 같은 영화를 보며 어른들의 사랑을 흉내낸다. 그들은 키덜트 문화 속에서 제약받던 삶에서 벗어나 아무런 속박 없는 해방감을 느낀다. 어른이 된 것처럼 능숙한 모습으로 현실과는 다른 삶을 살아낸다.
“이십에 뜻을 세우고 사십에 불혹하며 육십에 이순하고”, 키덜트는 이 모든 단계를 비웃는다. 나이에 맞는 행동이라니? 그들은 반문한다. 문화자본주의의 확대 재생산을 노리는 기업들은 이 양자의 소비 간극을 최대한 좁혀 어른에게는 향수로서의 소비를, 어린이에게는 소유욕으로서의 소비를 최대한 키워주는 마케팅에 전념한다.

키덜트들의 향수는 과연 자신이 겪은 바로 그 추억인가, 아니면 혹시 허위기억인가. 그들은 모두 행복한 유년기를 거쳤는가, 공주의 시기를 거쳤는가. 어린이들은 어른들을 흉내내며 혹시 독립된 어른으로서의 중요한 요소는 배우고 있는가. 아니, 키덜트 어른은 그들의 자녀와 같은 캐릭터를 소유하고 함께 해리포터를 보며 아주 작은 ‘개인’의 인권과 그에 따른 책임을 얘기할 수 있는가. 그들은 어른으로서의 역할모델에 자신이 있는가.

어른이 되고 싶은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긴 여행을 하며 어른이 되는 과정을 한없이 지연시키는 ‘철이’가 있듯이 이미 엄마이고 누이이며 연인인 철든 여성 ‘메텔’도 있다.

‘헬로, 키티’가 아니래도, 로봇 태권브이가 아니래도, 안나 수이의 화사한 블러셔가 아니래도, 우리는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많다. 투팍을 함께 들으며 이스트 랩과 웨스트 랩 간의 싸움과, 그 싸움의 하잘 것 없음에 대해, 그러나 죽음을 부를 정도로 치달은 음악인들의 싸움에 대해 얘기를 나눌 수 있다. 또, 한국무용 공연장에 무료티켓으로 입장해서 왜 수많은 래퍼들이 수억 달러의 돈을 벌게 되면 서른이 넘기도 전에 은퇴해버리는지, 그런가하면 왜 돈도 안 되는 한국춤을 저리 늙도록 추고 있는지, 그들에게 돈과 음악은 과연 무엇일 것인지 여러모로 얘기해볼 수도 있다. <모모>를 읽는 아이와 함께 어린 ‘너’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소중한 존재인 너는 다른 이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인권의 발달에 대해 나눌 얘기도 많다. 나눌 수 있는 문화는 많고 많으며 앞으로도 ‘너’와 ‘나’를 훑고 지나갈 하위문화도 많고 많다. 키덜트는 또 다른 신드롬에 자리를 내줄 테니까.

* 소설가 방현희는 장편 <<달항아리 속 금동물고기>>와 소설집 <<바빌론 특급우편>>을 펴냈다.
(2006.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