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칼럼] 밝히다 |구경미|

며칠 전 353개의 페이퍼 튜브와 166개의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져 화제가 되고 있는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에 갔다. 뮤지엄에서는 ‘여자를 밝히다’ 전과 ‘브랜드를 밝히다’ 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내 시선은 그 ‘밝히다’에 잠시 고정되었다. 영어로 스포트라이트라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으니 의미는 알겠는데, 그럼에도 내 머리는 자꾸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못말린다 생각하면서 나는 쿡쿡 웃었고 그래도 ‘밝히다’가 눈에 밟혀 급기야 집에 돌아와 국어사전을 펼쳐 들기에 이르렀다.
– 밝히다 : 어두운 곳을 환하게 하다, 불을 붙이거나 전등 따위를 켜다, 옳고 그른 것을 갈라 분명하게 하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드러내 알리다, 밤을 새우다, 드러나게 좋아하다.
‘스포트라이트’만 없었더라도 멋대로 해석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웠다. 그때 책상 위에 있던 책 세 권이 눈에 띄었다. 나는 최근에 읽은 책은 곧바로 책장에 꽂지 않고 며칠 책상 위에 두고 보는 버릇이 있었다. 책 세 권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그리고 다이 시지에의 <<D의 콤플렉스>>였다.
그 책들을 보는 순간 다시 머릿속 생각은 저 혼자 달아나기 시작했다. <<인간실격>>의 요조는 술과 애정과 죽음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의 아흔 살 된 주인공은 평생 창녀와 순수한 사랑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D의 콤플렉스>>의 뮈오는 프로이드와 꿈과 첫사랑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D 판사는 돈과 처녀를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머릿속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멀리 달아났다. 그렇다면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누군가는 비 오는 날 낚시를 갈 정도로 낚시를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역사에 특히 약한 면모를 보이던 누군가는 최근 신화를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자격증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음악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책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친구를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여행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밝히고, 아니 드러나게 좋아하고, 누군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문제를 몇 년간의 연구 끝에 밝히고, 아니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드러내 알리고, 누군가는……
나는 ‘밝히다’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곳을 환하게 하거나 전등을 켜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드러내 알리거나 밤을 새우거나 드러나게 좋아하는 ‘밝힘’의 경우는 많았지만 옳고 그른 것을 갈라 분명하게 하는 ‘밝힘’의 예는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무릇 ‘밝힘’ 많은 세상이 밝은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나니.
[소설가]
(2006.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