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칼럼] 나르콜렙시안 나이트 |이민하|

■ 동상이몽

일요일 아침의 터미널은 명절 때가 아니면 그리 부산하지 않다. 고작 예닐곱 사람을 태우고도 버스는 늘 그랬듯이 의기양양하게 달려간다. 달리지 않고 걸어가는 버스가 있다면 어떨까. 승객들 몰래 옆길로 새는 버스가 있다면…. 애용하는 21번 좌석에 앉아 습관처럼 창밖을 응시하다가 톨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한 달에 두세 번씩 만나온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헤어질 때 감사합니다, 외의 인사말을 찾을 욕구를 도통 유발시키지 않는 기사 아저씨가 어김없이 틀어 놓은 전국노래자랑 방송이 두 귀를 덮친다. 중국 주나라 때에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을 허락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장조(杖朝)’의 나이 팔순에 지팡이는커녕 여전히 마이크를 잡고서 ‘오빠’를 강요해도 비호감이 아닌 늙지도 않는 송해 아저씨가 인터넷에 잠시 회자되었던 ‘송해쏭’을 애교스럽게 팬서비스해 준다.
길고 짧은 터널들을 뚫고 지날 때마다 스카이라이프는 벙어리가 된 채 안티 팬들의 순간캡처로 쓰이기에 좋은 화면에서 멈춘다. 그럴 때마다 쨀쨀거리는 새벽녘의 수도꼭지처럼 어둠 속에서 새어 나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의 동공’을 극대화한다. 마주 앉는 법이 없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이미지는 단연 목소리가 주도한다. 핸드폰을 귀에 밀착한 뒷머리만을 보여 주는 앞 좌석의 남자는 물론이고 맨 끝자리에서 흘러오는 여자의 은밀한 통화 내용에 두 귀가 휘말리기라도 하면, 휴게소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리는 그들의 모습을 차창으로 훔쳐보게 되는 것이다. 핸드폰 폴더를 접는 소리, 외투를 걸치는 소리, 지갑을 꺼내는 소리, 내 옆으로 점점 다가오는 그녀의 몇 발자국, 일련의 소리들이 동영상이 되어 그녀가 내 옆을 스치면서 비로소 한 프레임 안에서 만나는 순간 비밀을 공유한 사이처럼 기분이 묘해진다.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가는 그녀를, 혹은 담배를 꺼내 무는 그를 창 너머로 건너다보며 마치 범행 장소를 확인하는 범죄자처럼 두근거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의식하기도 하는 것이다.
버스가 다시 시동을 걸자 길은 다시 달아나며 보이지 않는 저 끝에서 손짓을 한다. 이미 귀에 고인 엔진 소리와 스피커의 혼잣말과 금세 잠이 든 승객들의 밀도 없는 숨소리가 각자의 차선을 지키듯 질서 있게 운행된다. 승객들의 동상이몽이 한 곳을 향해 달려간다. 버스는 우주로 날아가는 커다란 관(棺)처럼 숙연하고 비장하고 경쾌하고 나른하다. 자칫 나의 잡념이 관의 무게를 더해 우주비행을 방해할지 모른다는 우스운 생각을 하다가 나도 잠에 빠졌다. 어쩌다 눈을 떠 보면, 은하철도 999의 차장 아저씨가 운전석에서 어렴풋이 아른거렸다.

■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잠의 기습을 받아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꺼져 가는 것을 느낄 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실핏줄이 모조리 탈수되어 끝없이 떠올라 모든 기억의 폭력에서 벗어난 꿈과 무의식의 은하수 속에서 유영하는 우주미아가 되는 듯한 생생한 느낌. 그것은 공포감마저 불사하게 만드는 황홀에 가깝다. 의식의 집착이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낱개로 떠오른 미지의 실루엣들이 색감과 동작을 보태며 서로 관계짓고 꿈의 대화를 나눌 채비를 갖추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물론 불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인 경험이다. 현실이라는 투명한 실에 꿰어진 무수한 낱알 구슬과 같다. 현실이라는 매끈한 수면 위에 끝없이 요동치는 미세한 파동과 같다. 바다의 살점이었던 튀어오른 물방울을 바다는 낯설어한다. 잠이 외로운 이유다. 꿈은 공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든 사람의 모습은 탐스러우면서도 암호처럼 어둡고 신비로우면서도 주검처럼 싸늘하다.
발가락을 감싸는 따뜻한 혀의 촉감. 그리고 나는 잠들었다. 사랑을 나누었고, 나는 또 몸이 굳었다.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잠시 후 깨어났을 때 당황한 건 우리가 아니었다. 불안한 그도 무안한 나도 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열정의 나른함. 그것은 그 시절의 체온을 훔쳐 뒤도 안 보고 시간 속으로 달아났다. 우리는 어색하게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어색하게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몇 번 더 만났으며, 어색하게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헤어졌다. 그리고는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그렇게 수면 편력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 10분간의 낮잠을 훔치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녔다.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잠들고 녹색 칠판 앞에서도 잠들었다. 잠의 물결 속에서 몸은 수초처럼 하느작거렸다. 그리고는 긴 잠에 빠져 있는 사이 첫눈이 왔다. 아니 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전설을 이야기하듯 입김을 나눴고, 입동과 결부시키며 털이 살아 있는 모자와 목도리로 몸을 감싼 사람들을 뉴스 화면은 클로즈업했다. 나는 오후에 잠깐 보일러를 가동시켜 올봄 이후 처음 난방온도를 3단계까지 높인 일을 상기했을 뿐이다. 그 시간 나는 변온동물처럼 땅 속을 염탐하듯 지상의 바람이 삼투되는 창문들을 닫고 이불을 파고들며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계절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았던 유년의 겨울은 안개사슬에 묶여 걸음을 떼지 못했다. 현실이라는 배급소는 망원경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골목 입구의 그곳을 나는 이미 추억하고 있었다.

■ 겨울-잠

겨울이면 살얼음 같은 혈관들에 신경이 몰렸다. 주변을 맴돌던 것들이 깨우면 일어나 밥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 뇌 속의 히포크레틴(hypocretin)이 겨울엔 더욱 고갈되는 걸까. 갸우뚱하면서 또 잠들었다. 히포크레틴은 수면과 각성을 조절하는 각성호르몬이다 그것의 결핍이 기면증(嗜眠症)의 주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면병과 동의어인 나르콜렙시(narcolepsy)는 본래 그리스어로 수면을 뜻하는 ‘나르코’와 발작의 의미인 ‘렙시’가 어원이다. 과다수면과 야간수면장애, 잠이 들거나 깰 무렵 의식은 깨어 있는데 몸은 안 움직이는 증상인 수면마비(가위눌림), 수면과 각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입면시 환각 등이 따른다. 특히 즐거움과 분노, 흥분 같은 정서적 자극이 있으면 갑자기 힘이 빠지는 탈력발작 – 감정의 변화를 오인한 우리 뇌의 연수가 몸을 잠의 상태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한다 – 과 낮에 꿈꾸는 증상은 기면병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증상이라고 한다. 지금은 보편적인 이해와 관심이 늘었지만, 걷다가도 잠들고 대화나 식사 중에도 잠들고 연인을 만나서도 잠에 빠지는 기면병은 아직도 영화나 TV 드라마의 소재로나 쓰이기 좋은 신비의 베일 속에 있다.
사실 누구나 매일 잠에서 깨어나고 잠의 세계로 돌아간다. 몸 속의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다. 생존의 약 1/3을 자면서 보내는 우리는 80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24년을 잠과 꿈의 세계에서 보낸다는 얘기다. 삶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동물들도 고유한 수면 방식을 갖는다. 개나 고양이는 평균 13시간을 자고 안전한 동굴 속에서 사는 박쥐는 20시간을 자는 데 반해, 강을 헤엄쳐 살아가는 인더스 돌고래는 1분 간격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힘들게 7시간 가량을 잔다고 한다. 자칫 부주의하면 사나운 물살이나 부유물로 인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왼쪽 뇌와 오른쪽 뇌가 교대로 잠을 자는 주먹코 돌고래와 참돌고래도 있다. 동물의 왕 사자는 잠의 왕이기도 하다. 사냥을 해서 배부르게 먹은 사자는 보통 2∼3일을 늘어지게 잔다고 한다. 사자가 잠깐씩 깨면서도 꾸준히 오래 잘 수 있는 것은 그를 공격할 동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에게 잡아먹히기 쉬운 동물들은 푹 자지 못하며, 언제든 도망갈 수 있는 자세로 서서 자는 동물도 많다.

■ 환각의 다리

우아하고 날렵한 포즈로 잠이 달려왔다. 달콤한 풀숲에 잠복하던 굶주린 사자처럼. 그의 보드랍고 수북한 갈기털이 닿는 순간 나의 목은 그의 이빨 사이에 하얀 두부처럼 끼워져 있다. 눈꺼풀이 떨구어지고 암전막이 오르고 커서를 깜박이던 모니터 위로 희미하게 몇몇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대화를 하고 누군가 내게 말을 건넨다. 그 한 마디 말이 끝없이 맴도는 환각의 다리를 건너가면 꿈의 세계다. 환각은 때로 눈을 감을 겨를도 주지 않고 현실의 사물들 위에 묘한 풍경들을 오버랩한다. 잠의 억압과 나의 투지가 팽팽히 맞설 때다. 간밤엔 검고 물컹한 뱀이 허벅지 사이를 스쳐 갔다. 환각은 현실과 꿈 사이에 있다. 주위 상황과 의식과의 경계가 불명확해지면서 기이한 소리나 영상, 생생한 감촉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는 환청을 들을 때면 기어코 수면마비에 직면하고 만다. 그 신호음을 따라 잠은 행진하고 몸은 마비된다. 그리고 의식은 속수무책이다. 대비 차원에서 항상 켜두는 불빛도 그 행진곡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행군하는 잠에 짓밟힌 몸이 환각의 다리 아래로 매몰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발버둥친다. 30분여의 악전고투 끝에 가위눌림에 이르지 않고 간신히 깨어나기도 한다. 이런 때 눈앞에는 천장이 내려와 있고 벽이 왼쪽 어깨를 삼키고 있다. 다시 환각이다. 당황하여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낯선 형체가 어른거린다. 손을 뻗어 닿으면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흩어진다. 이 때 다시 잠의 침공을 받으면 치명적이므로 사력을 다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선 공포감이 말소되기 전까지 절대 잠들면 안 된다.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몸을 환기시킨다. 드디어 허허벌판이 되어 다시 누우면 잠의 빗방울들이 온몸에 스미어 꿈의 싹을 틔운다. 그제야 고층건물의 창문이나 낭떠러지 아래로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하는 사람들이 꿈에 등장해도 깃털처럼 아름다운 그 풍경을 학습된 공포가 참견하지 못한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꿈은 매일 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꿈은 기면병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머리에 뇌파기록용 전극을 잔뜩 붙여야 하는 수면다원검사에서 잠에 드는 시간과 꿈에 이르는 시간, 그리고 주간수면에서의 꿈을 꾸는 횟수는 진단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기면병의 경우 눕자마자 잠들고 깊은 수면 없이 렘(REM: Rapid Eye Movement)수면으로 직행하며 낮에도 꿈을 꾸기 때문이다. 사람의 수면은 보통 얕은 잠에서 깊은 잠으로 진행되면서 몸을 회복하는 1∼4단계의 비렘수면을 거친 후,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꿈을 꾸고 뇌가 활동하는 렘수면에 이르게 되며, 90분 가량의 이 주기를 하룻밤에 4∼6회 반복한다.
파충류는 꿈을 꾸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충류가 포유류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렘수면이라고 한다. 한 번에 많은 알을 낳아 종족번식에 유리한 파충류에 비해 포유류는 번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생존과 직결된 사회에 빨리 적응해야 하므로 뇌가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렘수면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하루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아기의 잠은 절반 정도가 꿈이라는 사실이 증거라면 증거겠다. 우리의 꿈은 기억을 저장소에 보관할 것인지, 무의식에 빠뜨릴 것인지, 아니면 망각이라는 휴지통에 밀어넣을 것인지 구분을 하며 청소도 해 준다. 내 몸은 불어나는 눈덩이 같은 기억을 겨우내 치우느라 겨울잠을 원하는지도 모른다.

■ 길 위의 잠

리버 피닉스(River Phoenix)는 시월의 마지막 날 23년의 생을 멈추고 영원한 겨울잠에 빠졌다. 수백 년마다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올려 불을 피워 타죽고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불사조 피닉스처럼 할로윈파티로 들썩거리던 선셋대로변에서 약물로 몸을 태운 그는 죽기 두 해 전 나르콜렙시를 실감나게 연기했던 영화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 1991)에 남아 아직도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남창과 동성애의 현실 속을 떠도는 부랑자 마이크가 영원한 꿈인 아이다호로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에서다. “난 거리의 감식가야. 평생 길을 맛볼 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그리고 그는 길 위에 잠든다. 트럭을 멈추고 두 사내가 내려와 그의 가방과 구두를 훔쳐 달아나고, 지나가던 승용차가 그를 짐짝처럼 싣고 지평선을 향해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하늘의 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처럼 길게 드러누운 하얀 구름의 강 아래 황량한 벌판 사이를 뚫으며 끝없을 듯 펼쳐진 2차선 도로. 그 길도 우주로 날아가는 관처럼 숙연하고 비장하고 경쾌하고 나른했을까.
하지만 버스의 문은 관 뚜껑처럼 하늘을 향해 나 있지 않다. 버스가 멈추자 사람들이 길 위로 쏟아지고, 나도 잠에서 깨어난다. 여긴 어디일까. 이 길은 낯이 익지만 늘 어색하다. 사람의 얼굴이 그렇듯이. 리버 피닉스는 첫 장면에서도 길 위에 잠들기 전 중얼거렸다. “길 모양만 보면 내가 어디 있는지 알지. 분명히 와본 적이 있어. (……) 이런 길은, 정말 이렇게 생긴 길은 아무 데도 없어.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이 그렇듯이.” 나도 길 위에서 잠들고 깨어나고 실려가고 추방될 것이다. 나는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얼굴을 대하듯이.

[시인 / 시집 『환상수족』이 있음]
(2006.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