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해변의 얼굴 |김행숙|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남아도는 게 있을 거야.

이 말은 어쩌다 우연히 몇 페이지 들춰봤던 시집에서 읽은 건데, 시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애초에 서명 따위엔 눈길을 주지 않았으니 당연하겠죠. 그래도, “코로부터 넘친 코”, 그런 표현은 왠지 코믹한 데가 있지 않나요? 시답잖게 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코로부터 넘친 코, 입으로부터 넘친 입, 그리하여 엉뚱한 곳에서 살아가는 다른 코들과 입들에 대한 이야기, 라고나 할까요. 말하자면.
이곳은 어떤 여배우의 방입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세어보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배우에게 천 개의 얼굴은 자랑스러운 꿈의 목록일까요? 아침저녁으로 세수하는 그 낯짝의 거울일까요? 나는 어쨌든 그녀의 세 번째 이름에 푹 빠진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 난 사랑에 빠져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곧 그녀는 네 번째 이름을 살기 시작했죠. 내가 사용하는 세 번째, 네 번째라는 표지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표지를 열거하는 건, 잠 못 드는 밤에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그러다가 잠이 들거나 잡념의 꼬리의 꼬리를 잡으며 놓치며 날밤을 새는 것과도 같아요. 그녀의 안부를 물어도 될까요?
이곳은 어떤 여배우의 개인적인 방입니다.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유명하지 않아요. 그랬다면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한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못 되었겠죠. 우리는 차를 마실 생각이었는데, 찻물이 끓는 중에 생각이 바뀌어 포도주를 마시게 됐어요. 그녀의 얼굴도 바뀌고 있어요. 이미 눈치 챘겠지만, 그녀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는 뭐 그런 정도의 변화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녀는 말하자면, 다섯 번째 이름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녀는 사실 알고 보면 몇 번이나 유명해진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곧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이름을 살기 시작해서 구름같이 모인 팬들을 허공에서 흩어지게 했어요. 무리들이 실망하면 화를 내는 법이죠.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녀를 보여 줘. 그렇게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면, 또 다시 모양이 변하는 구름이 어디론가 흘러갈 뿐이었어요.
그녀는 심지어 열네 살 소년처럼 수염이 돋아나는 놀라운 아침을 맞기도 했어요. 맙소사, 내가 좋아했던 무릉의 복숭아 같은 그녀의 유방도 사라져버렸어요. 아, 나는 어디에 묻혀서 잠이 들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러니까 말이죠, 나는 어느 날 그녀가 고양이가 되어 나타난대도 놀라지 않겠어요. 대신 난 그녀의 열네 번째 이름을 지붕 위의 고양이에게 선물하겠어요. 그녀가 좋아할지, 아님 꼬리를 밤하늘에 삐죽 세우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낼지, 나의 정성을 완전히 무시해버릴지,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우리는 다른 언어를 쓰고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우정을 나누겠죠.
나는 극장에서 그녀를 보기도 해요. 알고 보면 여러분들도 그랬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내 옆자리에 앉아 그녀가 그녀를 관람하기도 했습니다. 객석의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스크린의 그녀를 보고 있자면, 어쩐지 으스스해지기도 하고 우스워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고, 뭐랄까, 복합적인 증상을 띠는 초기감기를 앓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분이에요. 객석의 그녀는 사람들의 물결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해요. 그녀는 정말 그녀를 잊어버린 것 같아요. 당신은 정말이지 멍청해! 그렇게 놀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니까요.
이곳은 어떤 무명 여배우의 개인적인 방입니다. 그녀가 나오는 영화 속으로 불쑥 들어간 듯이 나는 눈을 반짝이며 대사를 읊기 시작했어요. 나는 밤새워 원고를 썼답니다. 그녀는 나의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녀의 얼굴이 또, 또 바뀌고 있어요. 찢어지는 스크린처럼 그녀의 얼굴이 찢어지고 있어요. 그녀가 그녀의 방에서 사라지고 있어요. 그래도 나는 나의 대사를 끝까지 읊겠어요. 입으로부터 입이 넘쳐서 다른 입으로 그녀를 부를 때까지.
안녕, 나의 사랑. 오늘밤 내가 이곳에서 쉬었다 떠나듯이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멈추기로 하죠.

[시인]
(2007.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