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강, 시 |이준규|

요즘은 거의 매일 강으로 간다. 주로 해질녘에 가는데 지는 해 보는 것을 좋아해서다. 강에 가면 우선 강물이 있다. 언젠가부터 물 구경을 좋아하게 되었다. 우선 지루하지가 않다. 산도 좋지만 사실 산을 좋아한다, 기 보다는 숲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산보다 물이 좋다. 다 그렇지만 물빛은 매일 다르다. 그 다름에 매혹되면 쓸데없이 피곤한 감각에 사로잡힐 듯하고 그건 내 쾌락에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물빛을 보며 그저 참 좋다, 라고 느낄 뿐이다. 강에 가서 물을 보고 하늘을 보고 지는 해를 보고 구름을 본다. 그것들 보기도 벅찬데 다른 볼 것도 많다. 새도 있고 가끔 물고기도 뛰어오르고 내가 아직 모르는 풀꽃들도 있고 죽은 쥐도 있고 쥐의 속을 부지런히 오가는 벌레도 있고 버려진 담배꽁초, 과자봉지, 술병, 음료수병 따위도 있다.
물이 줄어들면 모습을 보이는 바위도 있는데 나는 그 바위에 ‘압섬’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름 짓는 자의 고독을 느꼈다. 한번은 조심스럽게 압섬에 오르기도 했다. ‘압섬’에서 보는 풍광은 또 달랐다. 강물을 보며 간혹 비유 비슷한 것이 머리에 떠오르면 잊으려고 애쓴다. 그래도 남는 건 있다. 하지만 그걸 시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런 것이 시라고 여겨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강을 보며 느낀 것은 물을 묘사하는 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저 강 위에 청둥오리가 있다, 정도로 쓸 수는 있다. 그건 청둥오리를 묘사한 것도 아니고 물을 묘사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걸 묘사한 문장을 본 적이 없다. 어떤 대상과 만나도 그 대상 자체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유는 그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꿀 뿐이다. 그리고 비유를 자꾸 찾는 것은 시에서 점점 멀어지는 좋은 방법이다.
예전엔 내가 무얼 느꼈다는 생각이 들면 서둘러 그것을 쓰거나 누군가에게 말하려고 했다. 요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말에, 그리고 글에 사람들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야 알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주 강에 가는 듯하다. 강에 가면 기쁘다. 사람 보다 사람 아닌 것에서 더 큰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어떤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인정한다. 나는 병자다. 강가에 있으면 맨 정신에도 괴상한 소리를 지르고 싶고 괴상한 몸짓을 병신처럼 하고 싶어진다. 그러다가 문득 이백이나 이하가 강을 대할 때 이런 자세로 서 있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어떤 자세를 취해보기도 한다. 심지어 조금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난 언제나 울 수 있는 사람이다. 강에 무슨 시를 생각하러 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 생각을 안 할 수도 없다. 내가 매일 꼭 생각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취미로 여기로 교양의 과시로 뜻을 풀어내기 위해서 술을 얻어먹으려고 시를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가 무슨 한량의 풍류를 알고 좋아해서 시인이 되겠다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나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종일 시 생각만 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그러면서 이런 내 상태가 시적인 상태라고 느낀다. 희극이고 비극이다. 곧 크라프의 중얼거림이 실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아름답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적 상식과 기대에 총알구멍을 뚫어놓겠다는 것이 내 목표다. 그건 천재적 재능의 유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짓이다. 그리고 천재는 아니지만 그 정도의 재능은 있다.
편한 마음으로 고백하는데 나는 목숨을 걸고 시를 쓴다. 이런 자세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내가 이런저런 사람들 기분 맞춰줄려고 이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시대착오적인 자가 몇 있다고 해서 한국문학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에 대해서 밖에는 쓸 수가 없다. 나는 나에게 가장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강가로 나가 석양 아래 강을 보고 덤으로 ‘긴꼬리할미새’ 한 쌍을 보았다. 날개를 폈다 접었다 하며 빠른 포물선을 그리며 나는 새는, 아름다웠다.
[시인]
(2007.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