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칼럼] 삶의 의미? 지금 삶의 의미라고 했나? |심보선|

1.
“삶의 의미?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어떤 타입의 남자를 진정으로 원하는지 알고 싶다고!” 얼마 전 학술대회에서 만난 내 또래의 일본인 문화연구자가 한 말이다. 그녀는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던지기를 열다섯 살에 그만 뒀다고 한다. 어차피 답이 없는 질문에 연연하는 건 뭐랄까, 구질구질(pathetic)하다고 일찌감치 결론 내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녀에겐 삶의 의미보다 좋아하는 남자의 타입을 찾는 것이 덜 구질구질한 셈이다. 그리 놀라울 것도 없다. 예전엔 열다섯이 지나서까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 종교인, 예술가, 지식인이었다. 종교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대강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답을 구하는 편이다.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좀 별나서 남을 괴롭히다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면서까지 굳이 어렵게 답을 찾았는데, 이제 이들에게조차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소위 ‘쿨’하지 않은 것이 돼버렸다.

2.
나도 ‘쿨’해지고 싶긴 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자꾸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고 내가 대단한 독서나 사유를 즐겨한다는 말은 아니다. 장구한 우주의 역사 속에 내가 우연히 인간으로 존재했다가 소멸한다는 사실에 대해 “도대체 왜?”, 뭐 이런 질문들을 던져왔다는 말이다. 이런 질문들은 정신의 습도를 10~20% 가량 높여주기 때문에 쿨한 태도와는 양립하기가 쉽지 않다. 출발은 지극히 비합리적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산다는 게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혼란스러워졌고, 그리고 공포에 떨었다. 어머니는 일주일간 가위와 악몽에 시달리던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셨다. 신경쇠약 증세가 좀 있다는 의사의 말에 무슨 걱정이라도 있냐고 묻는 어머니께 “난 왜 태어났어요? 사람은 왜 죽어야 해요? 사는 게 너무 무서워요!”라고 하면 다소 그로테스크한 불효를 저지르는 게 아닐까 싶어 잠자코 있었다. 이런 소아병적 증세는 나이가 들면서 극복했지만 질문은 지속됐고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그 질문과 씨름하면서 나의 좌뇌는 사회학으로 나아갔고 우뇌는 시로 나아갔다(오오, 양쪽 다 불쌍한 나의 뇌여).

지금 내 나이는 열다섯을 훨씬 지났다. 어떤 이는 아직도 삶의 의미 운운하는 건 내가 인류 전체에 대해 고뇌하는 경향이 있는 ‘물병자리’라 그렇다고 한다. 그럼 세계각지의 물병자리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초청하여 ‘물병자리가 바라보는 삶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학술대회라도 열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유머감각이 떨어지는 이는 내가 쿨하지 못한 근대주의자라 그렇다 한다. 쿨하지 못하다는 건 인정. 그러나 삶의 의미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할 뿐, 근대와 탈근대의 이분법 따위는 훌쩍 넘어선다. 속물, 즉 내면이 없이 천박한 것을 욕망하는 인간도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속물에게도 미덕이 있으니 그것은 귀여움이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 좀 봐달라고 귀염을 떤다. 오로지 타자의 시선으로 삶의 의미를 채우기 위해 이 귀여운 속물들은 얼마나 안달하는가! 결국 삶의 의미 추구가 내면에서 이루어지느냐 아니면 외부에서 이루어지느냐가 진정성과 속물의 차이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내면과 외부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엉킴으로부터 때로는 흥미로운 전도가 발생한다. 이때 진정성은 코드화된 상징자본(부르디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으로 전락하고 속물근성은 위선적 엄숙주의와의 투쟁(김수영의 ‘거룩한 속물’)으로 승화한다.

문제가 이렇게 복잡하다면 삶의 의미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단순한 답의 형태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건 답이 없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삶의 의미, 드디어 발견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 1면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면 그제야 “아, 답이 있었구나”라고 납득할 것이다. 허나 그들도 알게 모르게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나름대로’ 이성적 고민을 하고 도덕적 연민을 느끼고 미적 감동 젖어든다. 그러다 별 것 아닌 일상에 갑자기 출몰하는 컴컴한 심연이나 환한 빛을 경험한다. 스스로를 낯설게 마주보도록 강요하는 이 당혹스런 경험은 이후의 삶을 약간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이렇게 삶의 의미라는 심오한 기의는 삶의 의미라는 쿨하지 못한 기표로부터 미끄러져 인간적인 모든 활동 속에서 작동하고 표현되고 다시 생활의 미세한 갈래를 따라 어딘가로 미끄러져간다. 그러니 삶의 의미라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탈근대라는 또 다른 허수아비와 대적시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짓이 아니다.

3.
다소 생뚱맞지만 ‘단 한 번도 공을 잡아보지 못한 외야수’ 이야기를 하겠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은 이 외야수의 기구한 삶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매회 수비가 시작되면 그는 여느 선수처럼 외야의 자기 위치로 달려가 자세를 잡고 공이 날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9회가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 다음 경기에도, 그 다음 경기에도, 그에게는 공이 날아오질 않는다. 그러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외야수로서의 그의 존재의의는 “날아오는 공을 잡아라”는 정언명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야의 평화스런 고요, 푹신한 잔디, 이 모든 것들이 부추기는 공상을 즐길 여유가 그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딱, 하고 야구공이 배트에 맞는 순간과 척, 하고 공을 잡는 순간, 그리고 슈우웅, 하고 날아가 두 순간을 이어주는 공의 궤적, 이 셋이 삼위일체를 이룰 때 외야수의 삶은 말 그대로 외야수의 삶이 된다. 그러나 공은 여전히 그에게 날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삶은 불완전하다. 이 말은 “그의 삶은 실패다”라는 말과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날아온 공을 놓치면, 즉 에러를 범하면 “우우, 내 삶은 실패야, 괴로워”라고 푸념할 수 있다. 그러나 실패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이에게는 푸념조차 선망의 대상이다. 이 영구적인 불완전성으로 인해 ‘단 한 번도 공을 잡아보지 못한 외야수’의 삶은 부조리하다. 그런데 그 부조리가 그가 사는 힘이 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부조리를 깊이 있게 성찰하여 한국 최초의 야구선수 겸 철학자가 될 수도 있고, ‘세상에 이럴 수가’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유명인사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은퇴하는 바로 그 날 드디어 자신을 향하여 뚜렷하게 날아오는 야구공을 바라보며 삶의 숭고한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다. 아, 고쳐 말하겠다. 부조리의 발견이 그가 사는 힘이다. 모든 삶은 부조리하지만 부조리가 아무한테나 드러나지는 않는 법이다. 세속적 성공과 마찬가지로 부조리의 발견 역시 운과 환경, 그리고 노력이 중요하다. 누군가 ‘부조리를 발견하는 101가지 방법’이란 책을 쓴다면 이 점을 꼭 지적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4.
일본 문화연구자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네가 원하는 타입의 여자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니?” 나는 말했다. “음,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어. 굳이 표현하자면, ‘어딘가 한 구석이 세련되게 망가진’ 타입의 여자라고나 할까.” 이 말을 하고 나는 후회했다. ‘어딘가 구석이 세련되게 망가진’이라는 표현의 뜻을 영어로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으니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대충 설명하자면, 그녀는 부조리를 발견한 여자다. 그녀에게는 존재이유가 부재하는 것이 아니다. 부재하는 것이 그녀의 존재이유다. 그녀는 그것을 욕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녀에게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기다림의 헛됨을, 그 모든 부조리를 진작 눈치 채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런 여자는 뭔가 다르다. 그런 여자는 흔치 않다. 그런 여자가 나는 좋다. 그 여자가 나의 미래다. 나의 미래는, 그렇게, 또다시, 부재로 화한다. 제기랄.
[시인]
(2007.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