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칼럼] 폐허 |김근|

외주제작사 PD로 일하던 M은 낮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는 내게 전화해 김광석의 <나른한 오후>를 불러 달라고 했다. 휴가 나온 동생과 영화를 보고 막 나온 참이었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동생에게 면회 한번 가지 않았다. 그의 휴가 마지막 날 오후, 나는 동생을 불러 근무 시간에 종로에서 영화를 봤다.
황사가 심한 날이었다. 과장되게 비유를 하지 않아도 서울은 사막 같았다. 사막의 모래바람처럼 황사가 날리는 종로거리에서였다. 사람들은 안간힘을 쓰며 종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동생과 내가 본 영화는 조니 뎁 주연의 <프롬 헬>. 하필 영화 제목이 ‘지옥으로부터’였다니. 그 지옥 같은 황사 속에서, 전혀 나른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 거리에서, M은 내게 <나른한 오후>를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노래를 불러 줄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한 서평지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본래는 공익적 목적의 재단법인에서 운영하던 잡지였는데, 몇 달만 있으면 다른 사단법인에서 인수하기로 되어 있었다. 편집장과 기자들은 물론 반발했다. 수십 년 된 잡지의 공익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했다. 그해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고, 그 즈음 종로서적이 망했고, 또 그 즈음 내가 몸담고 있던 서평지는, 출판계 원로들의 성명에도 불구하고, 인수되었다. 그가 전화했을 즈음에는 인수에 반발해 기자들 모두 퇴사하기로 마음을 먹은 뒤였다. 부조리하고 불확실한 삶들이 또 얼마나 이어져야 할지 몰라 나는 또 끙끙대고 있었다.
바로 앞 사람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고 부연, 황사처럼 막막하던 날들의 오후 한때, 그의 목소리는 그곳과는 다른 세계에서 내게 타전되어 오는 것 같았다. 그에게 전화가 걸려오자 나는 더 막막해졌다. 그럼에도 어김없이 격주간 잡지의 기사 마감은 임박해 있었다. 나는 기사 핑계를 대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동생의 뒷모습이 황사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왠지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동생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이미 황사 속으로 사라진 그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입을 가린 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종로 한복판에 서 있었다. 막 서른을 넘어서고 있었다. 서울은 오래된 문명의 폐허 같았다.
M과 내가 <나른한 오후>를 열심히 불렀던 건 1997년이다. 가을 졸업여행에서였다. 휴학을 많이 해서 나는 아직 3학년이었지만, 동기들이 모두 졸업 예정이어서 나도 그 여행에 함께했다. 당시 우리 학과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던 소설가 최성각 선생이 이끄는 여행은 정선과 영월, 태백, 속초, 오대산 등 강원도 일대로 향할 것이었다. 조그만 승합차 한 대와 최성각 선생의 차, 동기 한 녀석의 자가용에 나눠 타고 우리는 출발했다. M과 나는 승합차에 함께 탔다. 동기들과 같은 4학년이던 92학번 후배가 제가 좋아하는 노래들을 골라 테이프에 녹음해왔는데, 우리는 여행 내내 그 음반을 들었다. 어떤 노래들이 그 테이프에 들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김광석의 <나른한 오후>만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아 참, 하늘이 곱다 싶어 나선 길/사람들은 그저 무감히 스쳐가고 또 다가오고/혼자 걷는 이 길이 반갑게 느껴질 무렵/혼자라는 이유로 불안해하는 난/어디 알 만한 사람 없을까 하고……/만난 지 십분도 안 돼 벌써 싫증을 느끼고……/아 참, 바람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아 참, 햍볕이 좋다 싶어 나선 길에/사람으로 외롭고 사람으로 피곤해하는 난……/졸리운 오후, 나른한 오후,/물끄러미 서서 바라본 하늘”

차 안에서 듣는 <나른한 오후>는 낯설기 짝이 없었다. 사실 들뜬 마음의 여행에는 어울리지 않는, 쓸쓸한 노래였다. 오히려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그 노래만 시작되면 우리는 모두 입을 모아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건 분명 기이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승합차의 창밖으론 강원도의 초가을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급한 커브를 돌 때마다 메트로놈처럼 이리 저리 같은 방향으로 함께 몸을 기울이며, 20대 중반에 접어든 여학생들과 20대 후반에 접어든 남학생들이 목을 길게 빼고 느릿느릿 입을 여닫으며 <나른한 오후>를 부르는 모습이란.
졸업여행은 조금 쓸쓸했다. 우리는 태백의 얼마 남지 않은 탄광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지하 50미터 아래 갱도는 어둡고 서늘했다. 아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졸업 이후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으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탄광은 그마나 문을 닫는다고 했다. 여행이 끝나면 동기들은 대부분 졸업을 할 것이었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질 것이다. 추억들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교정의 잔디밭을 떠돌 것이다. 그들보다 늦었지만 나 역시 또 막막한 삶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돌아오면서 아무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른해졌고, 쓸쓸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침묵했다.
M이 하필 뜬금없이 <나른한 오후>를 불러달라고 전화한 건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도 어쩌면 그때 나처럼 어떤 폐허를 견디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 뒤로도 나는 끝내 그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다. 요즘 들어 자꾸 그때 생각이 난다. 황사가 불지 않아도 2009년 한국은 1997년보다 2002년보다 더 지독하게 분명 폐허다. 역시 <나른한 오후>는 지금 여기엔 어울리지 않는다. M은 또 무엇에 기대 여기를 건너가고 있을까. 올여름, 그 폐허에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시인]
(2009.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