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칼럼] 떠난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에 관한 의문 |김대산|

나는 정신분석학을 잘 모른다. 뒤늦게 입학한 대학에서 프로이트, 라캉, 융의 책들을 조금씩 읽기는 읽었다. 하지만 유년기와 청년기에 어느 정도는 이루어졌어야 할 지적 훈련이 결여된 채 시작한 독서는 울화와 자책을 동반한 안구운동으로 끝났다. 앎을 얻고자 시도한 독서는 무지 위에 무지를 덧칠했을 뿐이었다. 획득한 것은 정신분석학의 체계적 내용이 아니라 ‘꿈’과 ‘무의식’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두 단어 뿐이었다. 그 후로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다.
도대체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의식이 없는 무엇? 의식이 아닌 무엇? 의식과 다른 무엇? 그런데 이렇게 물음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없음, 아님, 다름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고 그래서 무지 위의 무지 위에 또 다시 무지를 덧칠한다. 이런 상태에서 누군가가 무의식도 일종의 의식이라고 말한 것이 생각날 지경에 이르면, 앞이 캄캄해지면서, 벌컥 열이 난다. ‘일종의 의식’은 뭐람? 그렇다면 왜 애당초 ‘무의식’이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가 말이다! 한 단어에 부정접두어를 붙여서 만든 개념은 외연이 무한이란 말이다! ‘무-의식’이란 말은 의식을 제외한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그것은 사물이나 물질도 될 수 있고 심지어 존재나 실재도 될 수 있는 게 아닌가? 돌도 책도 무의식일 수 있고, 가령 스피노자의 무한실체도 무의식일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무지자는 지자들의 개념에 자신의 무지를 투사하곤 했던 것이다. 그 무지가 무의식일지도 모른다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꿈을 꾸었다. 1) 꿈속에서 잠자는 나의 얼굴 쪽으로 어떤 새가 날아와서 자신의 부리를 내 입 속으로 집어넣는다. 그 꿈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그 순간 나는 기겁을 하고 잠에서 깨어난다. 2) 해가 저물어가는 먼 산등성이의 나무 위에 작은 부엉이가 앉아 있다. 그 부엉이는 몇 년 전에 실제로 동네에서 밤에 봤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그 부엉이가 날개를 펼치고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산 밑에 있는 나를 덮쳐오는데, 작다고 생각한 그 부엉이의 크기는 하늘을 덮을 정도로 거대하다. 역시 기겁을 하고 깨어난다.
이런 꿈들이 어떤 무의식의 표현인지 나는 잘 모른다. 무의식의 표현이기는 할까? 정신분석학 책을 읽지 않았어도 그러한 꿈을 꾸었을지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하지만 이 의심을 불식시킬 방법이 있는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꿈은 이론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꿈일 것이고, 그 꿈은 진정 무의식의 표현일 수 있을 것이다!?
여섯 살 때의 꿈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꿈을 자주 상기하면서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니, 그 꿈 자체가 망각을 거부했다. 배경은 바닷가이다. 내가 일곱 살까지 살았던 부산에 위치한 송도 앞바다인 것 같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으며 어떤 슬픈 흑백영화의 한 장면같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비행기가 바다 쪽으로 뻗어 있는 활주로를 달리다가 천천히 이륙한다. 작별의 순간이다. 어쩌면 모두가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을 꾸고 있는 나도 슬프다. 나는 내가 비행기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느 쪽에 있어도 슬펐을 것이다.
이 꿈의 핵심을 난 작별의 슬픔으로 파악했다. 떠난다는 것, 이 사실을 제외하면, 왜 비행장이 바닷가에 있으며, 왜 비가 오는 하늘로 비행기가 이륙을 하며, 왜 많은 사람들이 슬픈 표정으로 작별인사를 하는지는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작별의 장소가 바다라는 사실은 중요했다. 사실, 중요하면서도 모호하다. 이 꿈이 바다’에서의’ 작별인지 바다’와의’ 작별인지 모호한 것이다.
이 꿈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의 취향도 그 꿈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굼베이 댄스 밴드가 부른 <Seven Tears>나 <Aloha Oe-Until we meet again>을 들으며 나는 바다’에서의’ 작별을 생각하며 가슴 뭉클해 한다. 해리 벨라폰테의 <Jamaica Farewell>도 빼놓을 수 없고, 장 끌로드-보렐리의 트럼펫 연주곡인 <바다의 협주곡>도 그렇다. 혹은 “내 고향 남쪽 바다”로 시작하는 가곡 <가고파>를 들으며 나는 바다’와의’ 작별에 대한 감상에 젖곤 한다. 테너 팽재유가 부르는 십 분에 가까운 <가고파> 전곡을 듣고 있으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설픈 감상주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안 좋아하는 답답한 습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는 것이다. <Auld Lang Syne> 즉 <석별의 노래>를 왜 내가 좋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곡을 편곡한 노래인 <I Understand>를 들으며 왜 슬퍼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게 다 꿈 때문인가?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어린 왕자>를 읽었다. 그런데, 유치하게도, 꽃과 어린 왕자가 작별하는 짧은 장면을 읽다가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왜 울어? – 부끄러워서. 왜 부끄러운데? – 울어서. 왜 울어? – 부끄러워서… 주정뱅이와 어린왕자의 대화처럼 보이는 이 문답은 순환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탐구의 구체적인 길을 가는 데 있어 순환의 오류와 같은 형식적 법칙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다. 순환이 어떻다는 말인가? 전제의 자리와 작별했던 명제가 다시 돌아온 전제-결론의 자리는 이전의 자리가 아니며 그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는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게 변했다. 여기서는 그 변화의 정도가 관심을 거의 자극하지 못할 만큼 극히 미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아닌가?)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동안 무언가 새로운 것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현상학에서 영향을 받은 가다머가 ‘이해의 부단한 왕복운동’에 대해서 말했을 것이다. 떠난다는 것과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사태인 듯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저 사태의 의미를, 아직, 제대로, 모른다, 나는. 이 무지 때문에, 나는, 윤회도 영원회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어린왕자, 꽃, 여우, 뱀의 의미도. 무의식의 의미도. 꿈의 의미도. 더구나, 그렇기에, 내 나름대로 저 두 사태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애썼던 소설가들의 소설도 나는 사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슬프다. 그저, 이해의 ‘그 언젠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나(?)는.
[평론가]
(2009.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