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칼럼] 백야의 개연성 |김경주|

첫 번 째 담배 한 개 비

그러니까 몇 년 전엔 겨울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설원을 달려본 기억이 있다. 기차는 끊임없이 창밖으로 자작나무를 보여주곤 했다. 자작나무는 땅에서 불쑥 솟은 창백한 손가락들처럼 서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한번 정도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창문을 바라보는 데에만 시간을 쓰게 마련이다. 그때 나는 입안에 내가 만나보지 못한 어떤 밤 같은 것을 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주 손가락을 그 밤에 담그고 있었다. 내게 백야는 그런 기분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았다. 백야는 빛이 잠들지 못하는 세계가 아니라, 다른 빛을 보는 시간에 가까웠다. 조금씩 백야는 입 안으로 흘러왔다. 입을 열지 못하는 시간으로 가서 말들은 빛을 바꾸고 멀미를 하곤 했다. 나는 그런 입안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 가고 싶었다. 객차에 앉거나 누워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벌리고 있는 입 안을 흔들며 기차는 달렸다.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겨울의 고비사막을 지나 그 기차는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두어 달 동안 그때 나는 사람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람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죽을 때가 된 고비의 낙타는 자신이 만난 사람들의 입술을 기억하기 위해 봄까지 웃고만 있다는데, 나는 자꾸 돌아와서 그 생각이 났다. 나는 이제 입술을 기억하기 위해 살고 있는 입안을 떠올린다.

수 만 개비 째 담배 한 개 비

백야를 처음 본 날 떠올린 건 누군가의 입안이었다. 그 사람은 하얗게 지샌 입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입안을 벌려 내게 자신의 백야를 보여주곤 했다. 그가 누워서 그 입안을 열어 보여주었는지 나를 자신의 무릎에 눕혀 놓고 보여주었는지는 잊어버린 지 오래다. 그 사람은 입 안에도 그림자가 있다고 말해주었고 내가 그것을 믿을 때까지 자신의 눈이 내 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입을 닫고 그를 더 이상 마중 나가지 않았다. 내 눈동자가 그의 눈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건, 백야를 처음 본 날의 이야기다. 백야가 먼 하늘에서 떠내려 오는 동안 나는 그의 입안을 떠올렸다. 내 입안에서 희고 긴 그림자 하나가 백야처럼 흘러나오는 것을 목격하고 있었다. 백야는 내 눈을 가지고 살고 있는, 몰래 떠내려 오는 입안이었다고 쓰고 싶은 저녁이 있고, 그런 저녁엔 천천히 백야에 만들어진 새들이 입술 위에 내려앉을 수 있도록 입안을 옴직거려 보아야 한다. 자신과 닮은 백야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쓰는 기록이란 시제가 존재하지 않거나 수많은 시차를 떠도는 문장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배웅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담배에 내리는 비

백야가 끝나갈 때가 되면 기차는 멈추고 입안의 손가락은 묽어진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글쟁이들은 ‘더 이상’이라는 단어가 의심되는 순간에 글을 집었고, ‘이 순간’이라는 말에 글을 비우곤 했다. 백야가 바다까지 흘러와 백야에도 밀물이 들어 찰 때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례의 관습과 닮아 있다. 사람이 음악을 멈추는 순간은 늘 백야의 장례를 치러주고 있는 기분이 든다. 결론을 말하자면 백야는 사실이 아니므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백야는 은밀한 것이므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야의 개연성을 자신의 눈 속에서 찾고자 하는 자가 한 마리 언어를 종이에 새겨 넣고 있다. 그게 누구라도 그가 은밀하게 내려놓은 하나의 플롯이 백지 속에서 새가 되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상상은 즐겁다. 새들은 늘 우리가 모르는 다른 시차에 내려앉는다. 그러니까 담배를 몇 대 피는 동안의 이야기에 기차는 달리고 백야는 내 피 위 흩어진 가장 좋은 설원이 될 수도 있겠다.
[시인]
(2009.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