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 신작시] 유년의 시놉시스 – 서(序) |김정환|

나의 유년은 초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
키가 큰 여자다. 유년은 키가 큰 여자 아래
성장 장애다. 그 키 너머를 나는 한번도
맛보지 못하였다.
눈자위가 너무 검은
어,
범접이 너무 생생하게
접촉적인
가슴 속 검은 수첩 그 속에
어?
순결을 무색케 하는
백지의 공란과 같이
어?
!
숯처녀의
이름만 묻어나는,
숭할수록 아름다운
바깥에서
고래는 언어다, 고래의 생명이
훨씬 더 육감적으로
언어이기도
전에…
30년 전 형편없이 낡았던 그 책이 내 손을 떠나
돌고 돌다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다는
희망은 헌책방 희망이 아니라 헌책 희망이다.
더는 제 몸에 새길 수 없는 그 무언가를
내 손금으로 새기고 싶다는 얘기지.
내용이 까마득하고 첫 소유자 이름도
무늬가 되어버린 그 책의
냄새도 감촉도 가뭇없다.
내가 사라지는
직전과 직후가 그러기를 바라는 나의
희망이라는 얘기도 되기는 되겠다.
내가 사랑하는
직전과 직후
부모도 자궁도 없이 세상 바깥에서
태아가 되어보고 싶기도 하기는 하였다. 가혹한
살갗의 사랑이여.
공포를 가공한 것으로 만드는
현대음악도 없이 나날의
현실이 뭇매일지라도 공포의
연속성을 벗고 싶기도 하였다. 연속은
복제된다. 단절은
옮길 수 없고, 운명 바깥에 있다. 시간
바깥에서 시간이 어긋날 수 없듯
두려움은 두려울 수 없다. 1980년,
10월 23일 당시 7세
서울시 도봉구 길음동에서 실종됨
특징 없음
당시 사진만 있음. `보고 싶은 우리 아이`
캠페인은 그렇게 실종 이전보다 훨씬 더 긴 실종
이후의 생애도 단절시킨다.
나의 유년도 오래된
동식물 도감,
그 디자인의 유년이 유년의 디자인이다.
늦게 왔는데도 아내가 없는 집안은
먼 나라 정물화 같다.
오늘 동네 어린이 놀이터에 가보았다. 아이들이
없는 시간에 그네도, 시소도, 미끄럼틀도 있었다.
미끄럼틀에도 엉덩이가 부대꼈다.
너무 가까운 과거형의 격차는
아파할 겨를이 없다. 역사는 제외되지 않고
삭제된다. 끝까지 왕성한 것은 발과 양말
사이 혹은 관계
정도랄까. 그래서
뉘앙스는 필요하다.
울화는 시간을 너무 잡아먹지만
무엇보다
모국어에 해롭다니까?
지금도 이 나라에 진주해 있는 청국 군대 같은 것은
(청국장은 너무 뻔하잖아? 너무 뻔한 것은
그럴 리가 없지)
간장 종지 냄새다.
그 사이
백만장자라는 말,
기와 얹은 쉰 칸이 둘러싼 마당에서
소를 잡던
마포구 대흥동 259번지 외가 옆에
미국적으로 느껴지던 시대가 있기는 했다.
(`미국적`과 `이국적`의 뉘앙스는 모종의 현대사가
느껴질 만큼 다르다.)
키가 큰 여자,
그녀의 지금의 나의
단절의,
압도당하는
쾌감의
낭패도 없이. 바늘에 패이며 내는 제 몸의
음악을 LP
음반은 즐기고 있을까? 아직까지 unitel.co.kr.
email 주소를 쓰는
소설가를 나는 안다.
(2009.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