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칼럼] 그가 웃는 동안, 그녀가 웃는 동안 |윤성희|

“그는 웃었다.” 요즘 나는 이 문장을 자주 생각한다. 하루에 한번씩.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그는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는다. 두 손을 허리에 올린 채 하늘을 보면서 웃는다. 이런 문장들이 연달아 떠오르지만, 그래도 나는 “그는 웃었다” 다음에 어떤 문장들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는 웃었다”라는 문장 안에 세상 모든 웃음들이 담겨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 나는 자주 이 문장을 떠올렸다. 언어로 슬픈 미소라고 말하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지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무엇보다 독서하는 게 힘들어졌다. 책을 읽다가 자주 멈춰야 했다. 쓸 수 있는 문장보다 쓸 수 없는 문장이 더 많다는 사실에 무서워지곤 했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라는 문장이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나는 이런 놀이를 했다. ‘내 자신을 삼인칭으로 여기기.’ 나는 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밥을 먹는다”라고 바꾸어서 문장을 만들었다. 내 어깨 위에 알 수 없는 화자가 앉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면: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웃어젖혔다. 웃는 도중에 홀리오는 유체이탈을 경험했다. 곧이어 유년시절 겪었던 한 사건이 떠올랐다. 엄마 손을 잡고 학교에 가던 길에 역시 자기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가는 장님 아이와 마주쳤다. 홀리오는 조금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 아이를 주시했다. 그 순간, 마치 핵이 폭발할 때처럼 그의 뇌 안에서 빛이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더할 수 없이 새하얀 아우라가 거리를 가득 메웠고 행인들은 유령으로, 거리는 무대로 변했다. 그 경험은 불과 이삼 초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홀리오는 장님 아이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우라가 사라지고 거리가 이전의 질서를 되찾자 장님 아이가 초점 잃은 눈으로 홀리오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는 엄마에게 다른 쪽 보도로 가자고 말했다. 지금도 방금 그는 마누엘이라는 인물로 분열했다. 십 분의 일 초 동안 다시 아우라가 나타난 순간 웃음을 얼어붙게 했다. 홀리오는 자신의 몸을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순간 마누엘의 몸 안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것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보처럼 그냥 알게 되는 것이었다.” (후안 호세 미야스, <그림자를 훔친 사나이>)

 

이 글을 읽다가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었다. ‘웃는 도중’이라는 말 때문이었다. 웃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먼 곳까지 갔다 올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그가 웃었다” “그녀가 웃었다” 라는 문장을 쓴 적은 있지만 “그가 웃는 동안” “그녀가 웃는 동안”이라는 문장은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웃었다” 혹은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라는 문장에서 해방된 것은 이 글을 읽은 후였다.

 

그래서, 이제 나는 이런 것을 생각한다. 그/그녀가 웃는 동안 멀리 멀리 여행을 가도록 해줘야겠다고. 웃는 동안(혹은 우는 동안), 그 짧은 몇 초 동안 내 소설 속 주인공들이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미래로 여행을 갔다 올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그의 현재가 누군가의 과거와 겹쳐지고, 그녀의 미래가 누군가의 현재와 겹쳐질 수 있도록. 그래서 웃고 나면(울고 나면) 자신이 타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도록.

 

“그는 웃었다.” 이제 나는 이 문장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을 상상한다. 그가 하, 하, 하, 웃는 사이 어딘가를 갔다 왔을까? 웃는 사이, 우는 사이, 멀리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라니. 웃는 동안, 먼 곳으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 다 웃고 난 뒤에 자신이 왜 웃었는지도 잊게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가]

(2008.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