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칼럼] 꿈도 참 야무져라 |김민정|

어릴 적 내 소원은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여자가 되는 것이었다.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서울올림픽 당시 100m 결승전에서 그녀가 10초 49라는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던 찰나, 나는 나의 우상이자 신화가 새로이 탄생하는 걸 직감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그때 어쩌다 웃자란 키로 육상부에 들어갔으나 가망 없음으로 곧 가방을 싸야 했던 나였으니 그녀의 질주가 왜 아니 부러웠겠는가. 실력도 최고였지만 무엇보다 그녀만의 스타일이라는 게 참 멋졌다. 색색으로 칠한 긴 손톱이며 긴 머리카락이 트랙 위에서 관중석 모두의 소실점이 되었는데 한마디로 그녀의 포스가 작렬하던 순간이라고나 할까.

 

그래 그 스타일이라는 거, 포스라는 거, 작렬이라는 거, 그로부터 20년 후인 베이징올림픽에서 나는 여러 선수들로부터 발견하고 느낄 수 있어 나날이 환호했다. 개막부터 폐막까지 매일매일 다양한 경기가 치러졌고 이를 통해 매일매일 많은 선수들이 스타로 급부상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인간의 몸에 대해,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간곡한 의지의 아름다움에 나날이 도취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선수들의 무한 젊음, 그들의 신세대적 감수성에 환기될 적 많았다. 그러니까 예전과는 달라도 뭐가 좀 달랐던 거다. 승부를 겨뤄야 할 타이밍이니 이기면 물론 좋겠지만 이겨도 담담했고 져도 당당했다. 왠지 모를 주눅에서 벗어나 당당히 포효하는 자신감의 표출, 이 세련된 매너가 우리에게 생긴 듯했다. 어떤 명예라는 측면도 중요하겠지만 속된 말로 ‘간지’를 중시하고 ‘굴욕’을 최대의 부끄러움으로 아는 요즘 세대 식의 자존심, 정말이지 신선했다.

 

야, 정말 제대로 노는구나, 놀 줄 아는구나. 중계로 해주는 모든 경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또 보면서 내 입에서 자주 터져 나온 그 ‘논다’라는 말의 ‘놀이’는 결국 스포츠를, 나아가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선수들에 대한 부러움과 부끄러움의 감탄사였을 것이다. 져도 울고 이겨도 울고 져도 웃고 이겨도 웃는 눈물과 웃음의 한 맥락, 나는 집어봤을까 나는 끌어당겨봤을까, 나도 집고 싶은데 나도 끌어안고 싶은데.

 

올림픽은 끝이 났고 어김없이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의 세계신기록은 깨지지 않았지만 나는 단거리에서 3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운 우사인 볼트라는 새 육상영웅의 탄생을 지켜보면서 복사뼈가 찌릿찌릿 하는 걸 느꼈다. 음, 이 간지러운 욕망의 신호탄이라니. 어쨌거나 현실로 돌아와 서른셋의 나, 꿈을 이루기에는 노구이니 어쩔거나. 우사인 볼트처럼 타고난 몸의 사내를 만나 그처럼 탐나는 몸의 사내아이를 낳아 아장아장할 때부터 꼬까신이 아니라 스파이크 신발을 신겨 트랙 위에 방목시킬밖에.

[시인]

(2008.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