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칼럼] 없는 이야기들 |하재연|

□ 기타큐슈
난 원숭이 같이 생긴 일본 남자랑 결혼해서 원숭이 같이 생긴 아이들을 몇 낳고 온천물에 얼굴을 닦으며 살고 싶어. h가 말한다. 고구마를 온천물에 씻어 주워 먹는 원숭이의 만족스러운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보다 피부는 좋아지겠지. 20년, 30년이 지나면 이빨은 흔들리고 못생긴 이빨을 가진 아이들과 살아야 할 테지만, 이치로를 닮은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여성적일지도 모른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여관의 음식을 준비하고 9시에는 온천을 청소하고 10시에는 손님의 이부자리를 개는 삶. 60이 되어도 홍조를 띤 얼굴이란 좋은 거지. 그렇고 말고.

□ 편의점
b가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의 대도시에 살아간다는 사실에 가장 고마워하는 것이 있다면, 편의점이다. 새벽의 편의점 산책에 관한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함께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구. b의 일갈은 자못 종교적이다. 24시간 어느 누구에게나 박애적으로 열려 있는 편의점의 포용력에 비하면, b의 태도에서는 어쩐지 개신교의 냄새가 난다. 그건 너무 편의적인 분류 아니니 하고 묻는다면, 샌드위치 및 테이블 와인의 리스트와 세일품목이나 끼워 팔기의 전략이 구매요인에 미친 상승작용과 발광하고 있는 로고를 향해 걷는 밤산책의 멜랑꼴리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나긴 답변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인류보편주의의 관점에서 b가 서울이나 홍콩이 아니라 와하까 어디쯤 태어났으면 어떨까 상상한다. 와하까 시장의 일요일 장보기와 인생에 대해서.

□ 멕시코행 고속열차
사진을 걸어놓는 이발사랑 모퉁이에는 모터카가 있는 은행원도 있지. 모래시계를 가진 소방수가 물을 뿌리니까 물고기와 핑거파이, 예쁜 간호사를 먹고 싶어. 이봐 그건 푸른 하늘 아래 페니레인 이야기 아니야? 아 미안, 술이 덜 깼나 봐. 김정미가 머리칼을 풀어 헤치고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지고 하니까 미치겠던데. 콧소리의 진정한 싸이키델릭이란 건 그런 거잖아. 밧데리를 사려면 편의점으로 가는 게 제일인데, 더블린에서 런던까지 배를 타고 도착하다니.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머리가 뒤죽박죽이야. 그냥 슈퍼마켓에서 그 애를 처음 만나 다시 연애나 해야겠어, 미안해. 락시 뮤직은 제일 멋진 밴드 이름인 것 같아. 왜? 라고 묻지 않았는데 어쩐지 그런 것 같았다. 초파리도 우주에 갔다 오는 세상인데 그런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 소설
i가 소설을 써서 보내주었다. 나는 필명으로 발표하고 나 말고는 아무에게도 밝히지 말 것을 종용했다. a가 소설을 써서 보내주었다. 반성이 없다. a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수영의 시에 나온 이야기였다. 반성이 없다구. p에게 시를 써서 보내 주었다. 이상이 그러는데 비밀이 없는 것처럼 허전하고 가난한 것은 없다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비밀인 양 속살거렸다. 마감이 닥쳐왔다. 모 작가가 마감을 독촉하면 가서 편집자를 찔러버리고 싶다고 했다면서? 아니야. 역시 기억을 잘 못하는구나. 그러니까 소설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지. 소설 쓰고 있네 하는 말도 있잖아. 모모는 없다 시리즈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다. 그 여자는 정말 내면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마구 웃다가 뚝 그쳤다. 잘 생각해 보니 하나도 웃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정말 이상한데. 너 음악시간에 돌림노래 해 봤지? 그게 마지막엔 딱 합쳐지는 거니 아니면 한 파트가 먼저 끝나는 거니. 나 거기서 이상한 쾌감을 느꼈었는데. 반복되면 시작도 끝도 사라지기 때문이라서 그런가? 그러니까 시작도 끝도 사라지는 게 아니었었나? 음악시간에 오르가즘을 느낀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나?

□ 무협의 세계
쓸데없이 주화입마되지 말고 진작에 강호의 길을 포기할 걸 그랬다. s가 말한다. 진심으로 하는 말일까. 왜 이독제독이라고 있잖아. 아니면 누구 아리따운 소저가 네 몸과 하나 되어 널 구해줄지도 모르는데 뭘 그러냐, 라고 위로해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든다. 무당파의 당주는 영혼의 눈을 가졌나 보더라. 그러냐 우리 사부도 영혼의 눈을 가졌나 보다.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더라. 에이 그건 신공이지, 영혼의 눈이 아니잖아.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는 말은 1930년대 잡지에도 등장하더라구. 그거 책장이 뚫어졌으면 헌책방에도 못 팔겠다. 갖다 버려라. 요컨대 네가 좋아한다는 순정과 무협과 락음악의 골자가 뭐냐는 거지. 로맨스 아니야. 돌고 돌고 돌아와 다시 도는 이 서전페퍼론리하트들의 세계.

[시인. 시집으로 『라디오 데이즈』가 있음.]

(2008.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