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칼럼] 피아노의 기억 |강계숙|

1.
피아노를 처음 쳤던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가재도구도 없는 네 평 남짓한 방 안에 참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그것은 놓여 있었다. 부모님은 그 육중한 크기에 다리도 펴지 못하고 주무셨을 게다.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TV나 냉장고, 세탁기보다 피아노를 먼저 사셨고, 나를 앞세워 개인 교습소를 가셨다. 그 무렵 기억나는 장면은 건반 위에 꽉 웅크린 작은 손과 그 위를 내리치던 하얀 회초리, 방울방울 떨어진 눈물자국이다. 방은 어둡고 침침했다. 거무스레한 낯빛에 뚱뚱한 여자가 곁에 앉아 있었다. 악보는 체르니 30번이었을 것이다.

2.
어머니는 스물넷에 청상이 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듬해 대학 3학년이었던 외삼촌은 사고로 돌아가셨다. 동생을 묻은 지 35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는 그 후로 단 한 번도 동생의 무덤을 찾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의 고통에는 시간도 무력하다.

3.
도시 빈민가에서 피아노를 개인 레슨 받는다는 건 지나친 사치였다. 그만큼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겠다는 어머니의 집념은 대단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그만 두고 대신 주산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번 왁스칠 하여 피아노를 윤이 나도록 닦으셨다. “나는 싫어, 피아노” “……”

4.
피아노를 다시 치게 된 것은 어머니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죽은 삼촌이 너를 참 예뻐했는데, 삼촌이 너만 보면 늘 말했어. ‘얘는 갓난애인데도 손이 참 길어, 누나. 이 담에 꼭 피아노 가르쳐라. 알았지?’
……”

5.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품은 적은 없었지만, 사춘기 내내 피아노는 내게 분신과도 같았다. 그랬던 것이 대학을 입학하고 난 뒤 언제부터인가 피아노를 조금씩 잊어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집에 있던 피아노는 다른 이에게 넘어갔고, 그 후 피아노의 자취는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책과 술이, 문학이, 사람과 사랑이 더 좋았던 탓이다. 하지만 손을 놓은 지 15년 만에 나는 피아노를 치러 집 앞의 작은 학원을 찾았다.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다시 체르니 30번을 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뵈러간 어머니에게 그 소식을 알렸더니, 눈시울을 붉히시곤 끝내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는 아무래도 동생을 만나러 갈 수 없으려나 보다.

6.
프로이드는 망각이 기억의 또 다른 보존술이라고 했다. 기억하기 위해 사람은 망각을 한다는 것이다. 기억하려고만 하면 오히려 기억할 수 없으므로, 망각 속에 기억을 저장하고 있다가 기억의 재생이 필요할 때 망각이 입을 벌린다는 것이다. 한편으론 망각을 해야만 지금 필요한 기억을 당장 잊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뇌도 용량이 정해져 있으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잊고자 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기억의 손실을 방지하고 싶어 할까? 영원한 고통은 영원히 잊히는 게 낫지 않을까? 프로이드의 논리를 따른다면, 여하간 인간은 망각을 통해 기억을 남겨두는 법이니 아무리 격심한 고통도 영원히 잊으려 하지는 않는 셈이다. 왜 그럴까? 고통을 생의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터이고, 고통의 향유라는 ‘주이상스’의 한 변형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기억 없는 자가 과연 어떻게 자신이 자신임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면, 인간은 고통의 기억마저 쉽게 버릴 수 없는 ‘저주’를, 자기의식의 존재로 살아가는 한,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받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잊혀야할 일이 잊히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 겪는 고통 중 가장 끔찍한 고통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살기 위해서라도 망각의 힘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망각할 수 없다면, 미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그렇다면, 미치거나 죽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잊지도 못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어떤 깊이의 고통일 것인가?

7.
그러나 나는 피아노를 다시 치면서 망각이 기억의 보존술이라는 점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기억은 결코 나의 기억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참 신기하게도, 한 음 한 음 건반이 울리고 손가락이 음표의 계단을 하나씩 디딜 때마다 망각은 흡사 접혀 있던 책갈피가 펴지듯 서서히 입을 벌려 과거의 풍경들을 연거푸 토해냈다. 토굴 같은 곳에 있던 벌집들, 밤에는 카페에서 연주하던 레슨 선생님의 빨간 스타킹, 학원생들과 처음으로 갔던 겨울철 실내 수영장, 태권도장에서 나온 동생의 손을 잡고 섰던 횡단보도 앞, 해질 무렵이면 돌아가던 석발기 소리, 쌀 한 쿰 달라고 구걸하던 문둥병 할머니, 여름이 되면 옥상 한가득 장미가 만발하던 무당 아줌마네 집, 그리고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씌웠던 파란 실크의 피아노 커버……. 건반을 두드리면서 나는, 내가 아주 많은 시간을 살아왔음을 비로소 느꼈다. 그것을 그동안 몰랐던 것이다. 잊고 있었기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음률이 내보인 기억은, 엄밀히 말해,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스틱스(styx)에 잠겨있던 피아노의 것이었다. 나는 다만 건반을 눌러 피아노의 입을 벌렸던 것뿐이다.

8.
기억은 자기 안에 있지 않다. 대뇌피질 어딘가에 잠복해있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그 때 그 순간 그곳에서 나를 피사체로 삼아 녹음하고 찍어둔 사물 카메라, 사물 축음기 속에 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는 그것을 열고 틀 뿐이다. 기억의 카메라이자 축음기인 나의 피아노는 얼마나 한참을 기다렸던 것일까? 피아노의 선율이 눈물로 들린다. 그 눈물들이 손가락 끝에서 기뻐하는 것 같다.

9.
어머니의 피아노는 무엇일까? 어머니에게도 피아노가 있을까? 그 피아노는 어머니를 동생에게로 데려갈 수 있을까?

10.
망각의 보존력은 위대하다.

11.
아니, 기억의 힘이 더 세다.

12.
아니, 아니, 기억은 약하고 망각은 기억을 단단하게 한다.

13.
최근 생긴 나의 바람은 예전에 곧잘 쳤던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다시 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아울러 쇼팽의 곡들도 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그 때, 피아노는 무엇을 펼쳐 놓을까? 두껍고 진한 시간의 퇴적층이 어른거린다. 아마 어머니의 눈물도 그곳에 각인되어 있겠지. 그러나 망각과 기억의 역설적인 변증법은 눈물도 웃게 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 눈물을 눈물이 있던 곳에 남겨둔다. 그래야 잊지 않으면서 잊고, 잊으면서 잊지 않는다. 주어진 시간은 짧지만, 생이 긴 이유이다.

[문학평론가]
(2008.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