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칼럼] 방명록 |진은영|

그는 지인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방문할 때 덧글이나 방명록을 남기지 않는다. 거기에 다녀갔다거나 잠시나마 너를 지켜보았다는 것을 알려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서성거리며 여기저기 달린 덧글들을 읽고 있노라면 관계에 대한 절박한 욕구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때마다 신기하다. 가끔 흉내내어보지만 곧 싫증난다. 어쩌면 그는 절박해서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 절박해지기 위해 타인을 만나는지도 모른다. 자기 안에는 절박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는 대충 어영부영 살 것이며, 그렇다 해도 사회의 평균적 수준에 비춰보아 그다지 나쁠 것도 없다.
그가 절박한 사람을 싫어한다는 애기는 아니다. 반대로 그는 누군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용감하게도 이렇게 불평한다. “도대체 넌 절박한 게 없어!” 사람들의 어이없는 절박함을 비아냥거리면서도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분개한다. 영혼의 빈구멍에 손을 넣어 그 자들이 무일푼임을 확인한 수전노처럼 말이다.
폭탄이 터지는 거리나 무너지는 하얀 굴속에서 뛰쳐나오는, 또는 빨간 쥐약이나 푸른 비소를 먹고 나뒹구는 절박함의 머나먼 국경에 아마도 그는 가닿지 못할 것이다. 어쨌거나 절박함은 아름답다. 거기에는 서두르기만 한다면 가고자 했던 곳에 당도할 수 있으리라는 실낱같은 헛된 희망이 있으니까.
가끔 그는 원고 마감일이 있다는 데 안도한다. 특히 아무 것도 절박하지 않아 도무지 쓰거나 말할 게 없는 이런 날에는. 마감시간의 절박함으로 하루를 때운다. 이런 날이면 입시로 아이들의 목을 조르는 여자들이나 분양차액을 위해 그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길이의 줄을 지어 여러 장의 서류를 손에 쥔 채 밤새 서있는 남자들에게도 잠깐씩 고운 눈길을 보낸다.
이 익숙하고도 만연한 절박함 사이를 서성이며 그는 질문한다. 문학은 또 다른 절박함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 삶에 왔다갔다는 것 말고. 문득 그는 어둠 속 허공을 질문의 창끝으로 마구 찌르면서 대답 같은 비명을 기다리는, 난생 처음 절박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시인]
(200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