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칼럼] 시멘트 빛의 천사 |허윤진|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해야 하는 말 속에서 익사하는 기분을 맛본 적이 있었다. 입 안 가득 찝찔한 해초를 물고 태양이 작열하는 해변에서 하루 종일 벌을 서는 기분. 혹사당하던 나의 모국어는 스스로 실종을 선언했다. 지독한 목감기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던 것은 모국어가 최후로 행사한 비토(veto)의 표지였는지 모른다. 침묵 속에서 나는 온전히 평화로워졌다. 다양한 언어로 각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완전히 고립된 모국어의 섬에서 나는 휴양지에라도 놀러온 것처럼 느긋해졌다.
유목민들의 대화는 어떤 문장들로 이루어져있을까? 인간의 덧없는 삶과는 무관하게 장엄한 궤도를 그리는 별에 대해서 이야기했을까, 그들은? 유목민을 잠시 흉내 내는 정주민인 우리는 서로의 근원에 대해서 묻는다. 안녕? 당신은 어디에서 왔나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사실 이런 순간을 위해서 모든 외국어 교재의 1과가 인사, 2과가 국적을 비롯한 신상명세 소개로 이루어져있는 것이리라. 우리에겐 식사를 하기 위해 모였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평온하지만 냉정한 얼굴을 한 수면 위를 아주 가볍게 스쳐가듯이, 그렇게 인사를 나눈다. 조용하고 나른한 단어들. 수면 아래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이 있음을 알려주기라도 할 듯 마음을 가득 휘젓는 말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가끔 언어가 1차원의 점이나 2차원의 평면이 아니라 3차원의 입방체임을 확인하게 된다. 예를 들면, 누군가 건넨 작고 사소한 문장이 잉크의 확산운동처럼 마음을 서서히 물들일 때. 단어와 단어가 감정의 부피를 순식간에 부풀린다. 저녁 즈음, 나를 잠식하는 두려움의 무게를 슬며시 걷어갈 것처럼 따스한 온기가 있는 말.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는 여기에서 사라져버릴 수는 없다고, 아침에 눈을 떠야겠다고, 잠시 또 용기를 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늘한 계절이 다가올 즈음 불어오는 청신한 바람처럼 정신을 일깨우는 문장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을, 나는 조용하게 사랑한다. 내게 편지처럼 가볍게 날려 오는 사람들.
그는 구겨진 신문지처럼 내 옆으로 날아 들어왔다. 얼핏 그를 쳐다보았다가 나는 황급히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실핏줄이 터질 것처럼 도드라진 눈의 흰자위와 차갑고 축축한 시멘트 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다. 불안한 듯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긴장했다. 그가 금방이라도 내 노트북을 빼앗고, 노트북을 땅에 내던지고, 나를 때리거나 밀칠 것만 같았다. 무언가에 들려버린 사람들은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묵묵히 한 글자, 한 글자, 익숙하고 편안한 모국어의 문자를 컴퓨터에 때려 넣었다. 무언가 폭발하기 직전, 찰나의 침묵이 주는 힘으로. 드디어, 그가 입을 뗐다.
Apple?
그는 컴퓨터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나의 컴퓨터는 IBM인 걸요. 예상과 달리 그의 첫 문장은 안전했다.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컴퓨터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 나는 컴퓨터를 켜는 법도 모르고, 파워 버튼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아. 백년 후에는 아무도 컴퓨터를 쓰지 않게 될 지도 모르고, 컴퓨터를 쓴다 해도 지금의 컴퓨터는 쓸모없는 게 될 테니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구석기 시대의 물건처럼 말이죠. (아주 먼 훗날, 그때 사람들은 정말로 플라스틱으로 된 사과를 깨물어 먹으면서 살아갈까?)
광기 어린 눈빛의 백인 노인과 대화를 나누는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그때 사람들은 나와 그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모두들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니 우리의 대화를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두려웠다. 나를 집어삼킬 듯 내 안에서 불어 닥치는 광풍을 그가 눈치 챈 듯 했으므로. 만일 그 순간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면, 그 안에는 비정상적으로 긴 팔과 다리를 한 채 최후의 한 방울까지 피를 모조리 어디론가 흘려보낸 듯한 창백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는 백인 노인이 있었 지도 모르겠다. 모래 맛의 베이글을 씹다가 문득 먹먹해진 나에게 그는 갑자기 뭔가 작은 통을 내밀었다. Painkiller. 고통이 있다면, 이걸 먹으렴. 나는, 고통이 전혀 없어요. 그래? 고통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이야, 암, 좋은 일이지.
고통이 없다고 항변하던 나의 눈빛이 그에겐 흔들려 보였을까? 그는 한동안 약통을 집어넣지 않고 있었다. 그 통에 씌어있는 글자를 유심히 보지 않아서 그 약통이 진통제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약통 안에 진통제가 아닌 다른 약이 들어있었는지, 아니면 아무 약도 들어있지 않았는지, 나는 정말 잘 모르겠다. 다만 나에게 최소한의 애착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 내게 처음으로 놀라운 질문을 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나에게 애착을 가진 이들도 쉽게 물어볼 수 없는 치명적인 질문을 내가 받았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가 pain이라는 단어로 겨냥한 것이 단순한 통증은 아니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고, 믿고 싶다.
진통제를 먹는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을 텐데, 그는 그럼 매일 몇 개의 알약을 먹으면서 고통을 견디었던 것일까? 그에게서는 아주 오래 술과 바람을 섭취한 사람만의 독특한 냄새가 났다. 그의 몸 안에는 고장 난 나침반이 있어, 그는 떠돌고 또 떠돌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냄새는 길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체득할 수 있는 미래의 시취(尸臭)였을지도. 나는 불안해졌다. 나에게서도 그런 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문장을 던진 그에게 쉽사리 말을 건넬 수가 없어 나는 백지 같은 침묵에 다시 빠져들었다. 그때 그가 나에게 선사한 조용한 기원(祈願)의 문장이 나를 서서히 굳게 만들었다. I wish you, angel, …… 그의 문장을 여기서 다 옮겨놓고 싶지는 않다. 미래가 언젠가는 현재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나는 계속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니까. 작고 어리고 친근한 대상을 부를 때 관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나에게는 선물처럼 들렸다고 하면 우스울까? 내가 지친 두 발로 터벅터벅 걸어서 사람들 사이에 외롭게 도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그가 호칭으로 표현해주었을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기원이 투명한 직관의 수학적인 결과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그냥 잠시 쉬고 있는 그런, 사람이지만, 그는 정말로 천사였을지도 모른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처럼, 사람들 사이에 사람의 모습으로 섞여있는 천사. 어쩌면 그런 존재가 생각보다 나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건, 정말 그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에게는 존재를 표현하는 일반 명사가 angel이어서, 나를 girl로 부르지 않은 모양이다. 그네를 타는 나를 그의 문장들이 공중으로 밀어 올린다. 한없이 동요하는 존재의 진폭. 어떤 문장들은 때로, 강력한 물리적 힘을 발휘한다. 가끔씩 되뇌는 시의 구절들처럼. 그는 나를 위한 기원의 문장만을 남긴 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내 삶의 막간극에 갑자기 등장하던 순간처럼, 그렇게, 실종되었다. 꾸깃꾸깃한 신문지가 회색 깃털처럼 남았다.
암흑 속에서 눈을 뜨면 놀랄 만큼 정확하게, 어제와 같은 장소에 와 있다. 혹시 오늘도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을 치유하는 문장을 들을 수 있을까? 고도는 심술궂은 노인네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다린다. 예상대로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다. 다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시멘트 보도 블럭이 서서히 물들어, 온 세상이 축축하고 서늘한 시멘트 빛에 감싸인다. 나는 그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문학평론가]
(2007.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