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칼럼] 안녕, 오다 |이신조|

안녕, 오다. 나름 좋아한다는 이유로 글을 한번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이름을 부르는 일부터 애매하긴 하네. YOU, 오다기리 조(オダギリ ジョ-). 오다기리가 성(姓), 조가 이름일 텐데, 조는 사실 가타가나로 표기된 영어식 이름 JOE. 조, 조, (나도 ‘조’!). 하지만 왠지 그렇게 부르게 되지는 않고, 싫고. 일본 여자들은 당신을 ‘조짱’이라고 부를까? 아니면 ‘조사마’?
너, 당신, 그대라는 2인칭 중에도 딱히 마음에 드는 게 없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선택했다면 끝에 ‘요’를 붙이는 존댓말을 써야 어울리겠지만, 그것 역시 내키지가 않네. 물론 3인칭 ‘그’를 사용해 대화체가 아닌 글을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가장 싫은 경우. 그래야 한다면 아예 당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아. 나는 지금 뭘 바라는 걸까. 그냥, 그저, 난 당신과 조근조근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는 너와 얘기하고 싶어’와 ‘나는 당신과 얘기하고 싶어요’는 참 다르지. 한국어만 이런 걸까? 이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무튼 내가 선택한 옵션은 ‘당신’과 ‘반말’.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좋아하는 주변의 몇몇 아리따운 지인들이 당신을 부르는 이름, ‘오다’. 당신은 이 글을 읽을 리 없겠지만, 아무쪼록 이 점을 양해해주길.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남자가 예전에 말한 적이 있어. 사랑은 그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흥, 바람직하기도 하시네, 그때 살짝 코웃음을 쳐주었던 건 그렇게 통달한 것처럼 말한 그가 결코 욕망에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뭐, 그게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사랑이 욕망만으로 이루어졌다면 차라리 문제는 단순명쾌했을 텐데. 사랑이 단순명쾌하지 않다는 사실은, 아니, 지나치게 복잡난해하다는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 복잡난해의 문제는 욕망보다는 명상으로 접근하는 게 현명한 태도 같기는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명상만으로 이루어진 사랑은 좀 곤란하지 않겠어?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잖아. 게다가 우리가 명상과 공상과 몽상과 망상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도 아니니……
거창하게 욕망이니 명상이니 운운하는 건, 물론 오다, 당신 때문이야.
외국인, 스타, 영화배우. 당신은 내가 욕망하기에도 명상하기에도 알맞은, 좋은 조건을 가진 대상이지. 거꾸로 욕망만을 하기도, 명상만을 하기도 불가능한 당신. 코코슈카의 그림, 존 버거의 소설, 엘리엇 스미스의 음악, 짐 자무쉬의 영화처럼 매력적인 텍스트로서의 당신. 아 참, 오다, 짐 자무쉬의 영화를 좋아한다며? 흥분하며 짐 자무쉬의 광팬이라고 말한 인터뷰를 봤어. 아, 당신이랑 짐 자무쉬 얘기를 하면 좋을 텐데. 최근에 본 <브로큰 플라워>와 <커피와 담배> 참 좋았어. 뒤늦게 본 <천국보다 낯선>과 <미스테리 트레인>도 물론. 당신과 같이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며, 음악을 들으며, 다리를 꼬고,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 살짝 낄낄거리며, 짐짓 불량하게, 꽤나 산만하게, 선문답처럼 짐 자무쉬 얘기를 하면 좋겠다. 일부러, 왕가위나 이누도 잇신 얘기는 하지 않을래.
아, 그런데, 왜, 내가 욕망하기도 하고 명상하기도 하는 대상이 바로 당신인 걸까. ‘외국인, 스타, 영화배우’라는 조건을 갖춘 텍스트들은 알다시피 차고 넘치는데 말이야.
나도 당신을 좋아하는 다른 많은 한국 여자들처럼 <메종 드 히미코>에 결정타를 맞기는 했어. 당신의 ‘등라인’이 어떻다느니, ‘힙라인’이 어떻다느니, 캡처를 해 둔 친절한 블로그가 많기도 하더군. 물론 그 전에 <피와 뼈>에서 기타노 다케시가 맡은 김준평의 사생아 아들로 잠깐 등장했던 당신을 눈여겨 봐둔 참이기는 했어. <박치기>에서는 통기타를 치며 북한 노래 ‘임진강’을 불러주어서, 윤동주가 다녔던 교토의 동지사(同志社)대학 학생으로 나와 주어서, 외국으로 떠났다 콧수염을 기른 코믹한 히피 청년으로 마지막에 돌아와 주어서 고맙기까지도 했어. <유레루>를 극장에서 보던 날은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오다기리 조 특별전’을 감상하겠다고 객석을 가득 메운 다른 여성 관객들처럼 넋을 놓고 당신을 바라보느라 자꾸 한글 자막을 놓치고 말았지만, 그저 ‘멋지고 잘 생겨서’가 내가 당신을 욕망하고 명상하는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미안하지만, 양조위 얘기를 안 할 수 없겠다. 지난 10년쯤 나의 가장 지속적이고 애정 어린 취미생활 중의 하나는 양조위를 욕망하고 명상하는 일이었는데, 양조위라는 텍스트의 특성상, 불면증이나 우울증 같은 예의 복잡난해한 부작용의 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사람이 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권유도 있고 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와중에 당신, 오다를 발견, 짐짓, 내 취향이 아닌데, 하면서도 마음을 빼앗긴 게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 미련할 정도로 착한 남자, 슬픈 남자 좋아하거든.
알아, 결국은 내 본위의 문제지. 당신 때문에 나의 욕망과 나의 명상이 조금은 방향을 달리했구나 하는 걸 실감하고 있어. 당신도 양조위처럼 편모슬하에 극장을 탁아소 삼아 자란 어린 시절을 보냈다지? 지독하게 낯을 가리고, 유난히 말이 없고, 스타 행세를 몹시도 불편해하는 것도 비슷하고. 하지만 양조위에겐 없는 것. 오다, 당신은 ‘피동형’이 아니라는 것. 아아, 이건 정말 미묘하고 조심스러운 말이야. 그렇다고 당신을 ‘능동형’이라고는 결코 할 수 없으니까.
일본에서 당신의 트레이드마크는 바로 못 말리는 아방가르드 패션이라지? 권위 있는 영화제 시상식에 세 갈래로 머리를 묶고 둘둘 말아 올린 연미복 바지에 항공모함 같은 부츠를 신고 등장해 주셨다지? 말이 좋아 아방가르드지, 엉뚱한 엽기 퍼포먼스에 가까운 그 초현실주의 패션 감각이 그러나 나는 단순히 엔터테이너의 쇼맨십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어.
오다, 당신의 얼굴, 그 표정 때문이야. 천진한 호기심이 스친 다음 이어지는 오만한 결핍, 조금은 뒤틀린 그러나 치명적으로 왜곡된 것은 아닌, 불안정하고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할 수 없이 마음이 놓이는 다감한 신뢰, 게슴츠레 찡그리듯 눈웃음을 치며 어두운 창문을 열고 방 안을 들여다보듯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는 당신의 얼굴, 이게 다가 아니라고,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름다움도 이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얼굴, 미소와 한숨, 열망과 좌절이 동시에, 다른 방식이 있다고, 다른 세계가 있다고, 물론 쉽지는 않다고, 하지만 해 볼만 할 거라고, 실은 나도 잘은 모른다고, 절박하지만 짐짓 장난스럽게, 경멸하지만 함부로 저주하지 않고, 불투명한 자유, 유쾌한 어둠, 그런 꿈을 꾸는 얼굴, 그런 꿈을 꾸게 하는 얼굴.

 

두고두고 당신을 떠올리며 욕망과 명상을 반복할 터이니, 이제 그만 이 글은 마쳐도 좋을 것 같아. 뭔가를 만들어내고 표현해내는 것을 인생의 주제로 삼은 입장이다 보니, 오다, 당신이나 나나 수고가 많네. 애써 만들어내고 표현해낸 것에 얽매이지 않아하는 당신이 좋아. 무언가의 온전한 도구가 되는 것,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지. 크리에이터로서 당신에게 계속 행운이 있기를. 뭐라고? 앗, 이런, 들켰군. 그래, 맞아, 나는 아직도 양조위를 좋아해. 아무리 당신을 좋아한다고 요란하게 호들갑을 떠는 것으로 그를 잊어보려 노력해도 시도는 번번이 실패야. 흠, 역시 복잡하고 난해하다. 당신도 알지? 그래, 그래도 그렇게 웃어줄 줄 알았어. 후후, 어쩌겠어? 당신이 좋아. 안녕, 오다.

[소설가]

(2007.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