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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弔] 소설가 최인훈 선생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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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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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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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 거목, 『광장』의 작가 최인훈 별세…향년 84세 (연합뉴스)

소설 '광장'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작가 최인훈이 7월 23일 오전 10시 46분 별세했다. 향년 84세.
지난 3월 말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경기도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1934년(공식 기록은 1936년) 두만강변 국경도시 함북 회령에서 목재상인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일제강점기하 식민지 교육을 체험했고, 해방과 더불어 밀어닥친 소련군 진주로 함경남도 원산으로 온 가족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이어 고등학교 재학 중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부산행 해군함정에 몸을 실어 월남했다.
전란 중인 195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6학기를 마쳤으나 전후 분단 현실에서 공부에 전념하는 데 갈등을 느끼고 1956년 중퇴했다. 이후 군에 입대해 6년간 통역장교 등으로 복무했고, 1959년 군 복무 중 쓴 단편소설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와 「라울전(傳)」을 ‘자유문학’ 지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듬해 4.19혁명이 있고 7개월 뒤인 1960년 11월 ‘새벽'지에 중편소설 『광장』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발표 직후부터 문단 안팎에 적지 않은 파장을 가져왔고, 전후 한국문학의 지평을 새롭게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되며 60년 가까이 꾸준히 사랑받았다. 출간 이후 현재까지 통쇄 205쇄를 찍었고, 100만부 넘게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도 보유한다.
고인은 자신의 대표작 『광장』에 대해 "4·19는 역사가 갑자기 큰 조명등 같은 것을 가지고 우리 생활을 비춰준 계기였기 때문에 덜 똑똑한 사람도 총명해질 수 있었고, 영감이나 재능이 부족했던 예술가들도 갑자기 일급 역사관이 머리에 떠오르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광장'은 내 문학적 능력보다는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작가로서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광장』을 수차례 다듬는 데 공들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판 이후 9차례나 고쳐 총 10개의 판본을 냈다. 내용을 일부 바꾸는 등 굵직한 개작만 해도 5차례에 달한다. 한국문학사상 가장 많은 판본을 지닌 작품으로 꼽힌다.
『광장』을 필두로 그는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분단 현실을 문학적으로 치열하게 성찰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은 "뿌리 뽑힌 인간이라는 주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대시킨 전후 최대의 작가"라고 평하기도 했다.
전망이 닫힌 시대의 존재론적 고뇌를 그린 『회색인』(1963),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파격적 서사 실험을 보인 『서유기』(1966), 신식민지적 현실의 위기의식을 풍자소설 기법으로 표현한 『총독의 소리』(1967~1968) 연작, 20세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문제 삼으며 동시대인의 운명을 조망한 대작 『화두』(1994)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2003년 계간지에 발표한 단편 「바다의 편지」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 않았다. 그는 2008년 신판 '최인훈 전집' 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한 권 분량의 새 작품집을 낼 만한 원고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이듬해 자신의 희곡이 올려진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나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은퇴란 없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의 이름은 해외에도 알려져 『광장』이 영어·일본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중국어 등으로, 『회색인』과 『옛날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영어와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됐다.
동인문학상(1966), 한국연극영화예술상 희곡상(1977), 중앙문화대상 예술 부문 장려상(1978), 서울극평가그룹상(1979), 이산문학상(1994), 박경리문학상(2011), 보관문화훈장(1999)을 받았다.
1977년부터 2001년 5월까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했으며 퇴임 이후에도 명예교수로 예우받았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음에도 정작 본인은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한 데 대해 "열악한 환경에서도 최상의 혜택을 줬는데도 누리지 못한 그때의 내가 너무 밉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크다"고 깊은 회한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 얘기를 들은 서울대는 지난해 2월 그에게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는 지난 3월 말 갑작스럽게 대장암 말기로 진단받고 투병을 시작했는데, 병상에서도 제자들과 평론가들을 격려하고 작품을 다듬는 모습을 보였다고 유족은 전한다. 또 근래 남북 해빙무드에 큰 관심을 두며 "통일보다 재통일이 더 위대하다. 처음부터 통일되어 있어 끄떡없는 것보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했다가 여태까지의 흐름을 거슬러서, 그렇게 다시 한국이 통일된다면 참 위대한 일이다. 마치 삼단뛰기라는 운동의 원칙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뜀박질이라도 세번째 한 것이 더 위대하다. 그것이 변증법이라는 말의 진정한 가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족으로는 부인 원영희 여사와 아들 윤구, 딸 윤경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02-2072-2091)에 차려졌다.
장례는 '문학인장'으로 치러지며, 위원장은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원로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이 맡았다.
영결식은 25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내 강당에서 열린다. 발인은 영결식 뒤인 같은 날 오전 9시,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공원묘원 '자하연 일산'이다.

∎ 최인훈 작가 별세, 애도 물결 (MBN)

어제(23일) 세상을 떠난 최인훈 작가를 추모하며 문학과지성사 공동창립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병익은 "작가로서 영향력이 컸지만, 문학권력이라고 할 만한 건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별로 만나지도 않고 오직 글만 쓰고 문학으로만 말한 분이다. 정말 예술가였다"고 말했습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린 빈소에서 만난 김 평론가는 고인을 "유명 작가라면 사회적·세속적 지위를 욕망하기 마련인데, 그분은 그런 데 전혀 욕심이 없었고 오로지 글 읽기·쓰기에만 전념했다.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다른 사회활동이나 대외적인 활동을 전혀 안 했다. 타고난 작가이기도 하고 모든 걸 수렴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어디에 매이지 않는 자유지식인이었다"고 돌아봤습니다.
또 "그분이 감으로써 그분이 살던 시대도 함께 가고 있다고 봐야 할 거다. 한 시대가 가고 있다는 설움이랄까 그런 걸 느낀다. 어차피 시대는 변하니까 그분을 그리워하고 존경하고 사표를 삼을망정 따라 할 순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광장』을 통해서 분단 현실을 제기하기도 하고, 『회색인』을 통해 지식인의 고뇌를 드러내기도 하고 환상의 충돌로 내면적인 번뇌를 드러내기도 했으며, 서간 형식 등 비전통적·실험적인 수법으로 현실을 표현했다. 특히 '광장'을 기존의 한문 혼용 문체에서 한글 전용 문체로 바꿨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서 한때 동료 교수로 지낸 정현종 시인은 빈소에 들리는 목탁 소리를 듣고 "고인도 승려 같은 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학교에 같이 있을 때 한 번은 같이 소풍을 갔다. 경기도 어디를 갔는데, 신발을 벗고 양말을 벗고 시냇물에 들어갔다. 그분이 평생 맨발로 시냇물에 들어온 적이 처음이라고 해서 놀랐다. 대단히 지적인 작가이면서 아주 아이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분이었다"고 추억했습니다.
빈소를 찾은 후배 작가 이인성은 "최인훈 선생님은 근대를 넘어서 동시대 현대소설이라는 것의 문을 처음 열어주신 분인 것 같다. 한국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 선생님 이전과 이후는 소설 쓰기 자체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주로 『광장』을 많이 얘기하는데, 나는 『회색인』이나 『서유기』를 읽으면서 쇼크받고 영감도 받았다. 이런 작품들에 대해서는 난해하다는 이유로 조명이 많이 안 된 듯한데, 전체적으로 한번 재조명이 되고 독자들이 읽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숙명여대 교수인 최시한 작가 역시 "흔히 김승옥이 우리나라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하는데, 사실은 매우 지적인 상상력을 보여준 분이 최인훈 선생님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환상적이기까지 한 모던한 상상력을 잘 보여줬다"며 "나는 대학에서 문학개론 시간에 늘 「웃음소리」를 갖고 수업을 한다. 너무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작가로서 많이 읽고 깊이 사색해야 한다는 걸 아주 분명히 보여준 분이기도 하다"고 애도를 표했습니다.
서울예대 제자 강영숙 작가는 "예술론을 주로 가르치시면서 늘 엄격하고 어려운 분이셨는데, 2015년 제자들이 팔순 행사를 열었을 때 인간적으로 대해주셔서 참 좋았다. 손을 잡아주시면서 글쓰는 일을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편하게 잘 쓰라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따뜻한 걸 쓰라고 하셨다. 그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거라 생각 못했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역시 제자였던 윤성희 작가도 "선생님께서 소설 강독 수업을 종종 했는데, 언어에 엄격하셨던 기억이 있다. 사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서울예대의 중심이셨고, 발자취를 잘 남겨주셔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되는 분이셨다"고 떠올렸다.
최근 고인이 오랫동안 몸담은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젊은 작가 정용준은 "수능 세대로서 선생님 작품 『광장』을 교과서로 접하고 공부한 입장이다. 작가가 되면서 후배로서 더욱 뵙고 싶었고, 학교(서울예대)에 선생님이 쓰시던 방(연구실)이 아직 그대로 보존돼 있어서 종종 그곳에 가서 머물기도 했다. 언젠가 가까이 뵐 수 있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떠나셔서 애석하다"고 아쉬워했습니다.
최인훈 작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좋은 작가는 오직 그만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들이 옷깃을 여미고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최인훈 선생은 작가로서 축복받은 사람에 속하고, 어떤 부분은 타고나기도 했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태어나고 남한에서 살게 된 것은 주어진 운명이지만,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한 선택은 자기가 한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빈소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영화감독 이창동이 조화를 보내 애도를 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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