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사랑방

최하연 시집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작성자
문학실험실
작성일
2018-04-26 15:29
조회
464
― 몇 시냐고 물으면 당신들의 모든 시간에서 한 줄만 빼요…
― 들끓고 뒤섞이며 무한으로 달려가는 시어들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는 200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피아노』 『팅커벨 꽃집』을 내놓은 최하연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최하연 시인은 SNS를 전혀 하지 않는다. 최하연 시인을 알 수 있는 길은 그의 작품을 읽는 것 말고는 없다. 이 시인의 독자들 역시, 그러한 시인의 성향과 닮아서인지 SNS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SNS의 거품 속에 소위 ‘대단히’ 과소평가된 시인 중 하나이다. 시인의 독자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의 시를 읽는 것은 시집을 통해서일 때 온전한 시 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독자들은 새기고 있다.
그의 시집은 그러므로, 책방의 서가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 그것도 인터넷 서점이 아닌 생생한 현실의 책방, 특히 동네의 작은 책방에서 최하연의 시집을 만나는 것은 반가움조차 과잉된 감정으로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럽다. 마치 그 자리에 있을 것이 있는 것처럼,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처럼.

■ 의식하지 않아도 기억되는 기억들, 기억 연작

바람은 안에서 밖으로 불고
빗방울은 아득한 곳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진다
내 편 아닌 모든 것은 잠들라
아침이면 난 이곳에 없으리니
용케 젖지 않은 꽃잎도
꽃잎 아래 웅크린 하늘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꿈은 밖에서 젖는다
잠들라, 젖지 않는 밤의 노래도
부르지 못한 이름도
다 잠들라
내 안으로 자라는
마른 뿌리도
기약 없던 당신의 마른 젖가슴도
이제는 젖어서 모두
꿈 밖에 놓인다
하늘로 떠가는 새와
그 아래 잠든 침묵이여
숲이 숨길 수 없는
비밀의 무게와
저 적막한 입술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진 간절한 기도도
벼락처럼, 이슬처럼,
잠시 왔다가 떠내려가는
하얀 손의
악몽 같은 것들도
이 바람 속, 이 아득한 물방울 속에서
다 잠들라
(「기억 꽃잎」 전문)

“뒤돌아보지 마라.”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금기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돌이 되거나, 소금 기둥이 되거나, 지옥으로 떨어졌다. 이는 단지 옛이야기가 아니다. 뒤돌아본다는 것, 즉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결단이 필요한 행동, 그러한 상태인 것이다. 결단하고 기억하려 해도 우리의 생활이, 세상이 속삭인다. ‘앞만 보고 가야지, 세상이 컨베이어벨트처럼 흐르고 있는데, 남은 것과는 멀어져야 해.’ 그러므로 ‘세월호’를 굳이 떠올릴 것도 없이, 기억은 머리로만 할 수 없기에, 몸에 새기게 된다.
시는 시인의 몸이다. 몸에 새긴 기억들이 돌로, 소금 기둥으로 굳어진 몸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굳어버린 몸이므로 더욱더 선명히 빛을 낸다.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에 수록된 시편들, 그중에서도 기억 연작들은 시인의 몸에 새긴 기억들이다. 컨베이어벨트가 가는 방향을 거슬러 뒤돌아보며 새긴 기억들이다. 그 기억들을 독자들은 읽고 또 다른 기억의 돌이 된다. 이로써 시인과 독자는 시 쓰기와 시 읽기를 하나로 연결하며 기억하기, 즉 ‘시+하기’를 하는 것이다.


■ 텅 빈, 사이와 사이로 감싸 올린 기억들

서시에 해당하는 「기억 꽃잎」에서는 “아득한 곳에 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용케 젖지 않은 꽃잎”이 있고 “그 아래 웅크린 하늘”이 현실의 풍경을 위아래 뒤집은 이미지로 제시된다. “불현듯 찾아온 난독증”은 “다리가 짧아진 밤” “칼 맞는/ 밤”에 일어나고(「기억 날」), “사라질 때마다/ 사라지는” “아이”와 “늘 나를 남겨놓고 다니는” 내가 있다(「기억 범람」).
“달리기를 멈췄을 때/ 시작되는 기차의 이야기” 속에 “조금씩 모자란 유년의 그림자가/ 하나둘/ 어둠으로 돌 아”가고(「기억 안개」), “눈물 한 방울이/ 빛의 속도로/ 너에게로” 가는, “냉장고 속에 어둠이 있”고 “어둠 속엔 냉장고가 있”는 “영혼”이 “얼어 죽”는 “오늘 밤”(「기억 계절」)은 “새가 새로 낸 길로만/ 다니는” “귀신에겐 없는 금 밖의 세계”(「기억 구름」)이다. “풀잎 위에/ 허무주의가/ 젖은 것과 젖지 않은 것 사이로” 맺히고(「기억 군락」), “골목과 대문 사이” “창문과 창문 사이” “공이 짖”고 (「기억 퇴적」), “악어의 잠과 토끼의/ 눈물 사이에” “슬리 퍼 한 짝”이 걸린다(「기억 방」). 그 “슬리퍼 한 짝”이 어쩌면 최하연의 시인지도 모른다. 결핍이면서 효용성이라 고는 단 한 방울도 없는, 나머지 한 짝의 행방도 모르고, 찾을 수도 없고, 찾지도 않는…
(최규승, 「기억과 기억 사이, 어떤 시간과 아무 공간」 중에서)

* 문학실험실 홈페이지: www.silh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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